손기정 일장기 지운 미술기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18] 수묵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

등록 2016.04.18 21:19수정 2016.04.1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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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樓下洞天(누하동천)’의 당호를 갖고 있는 청전 이상범 가옥 ⓒ 유영호


[기사보강 : 19일 낮 12시 5분]

앞서 들른 노천명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수묵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이 1942년부터 1972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했던 집(누하동 178번지)과 그의 화실(181번지)이 있다. 이곳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일반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거장의 그림과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좁은 골목길 막다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아늑하다는 느낌을 준다. 마당에 들어서면 처마 밑에는 '樓下洞天(누하동천)'이라 적힌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동천(洞天)'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을 뜻한다. 이곳이 바로 누하동 절경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붓을 들었으리라.

또 자그마한 담장은 꽃담으로 꾸며져 있는 등 작은 마당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마당에서 대청과 안방 등 건물 내부 곳곳을 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옆 화실에는 그의 그림은 물론 여러 화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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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이 직접 만들었다는 꽃담. 본래 이곳에 ‘忠信(충신)’과 ‘智慧(지혜)’가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한쪽이 파손되어 사진 속 꽃담 좌측의 ‘忠信’이란 글씨만 남아있다. ⓒ 유영호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걸작들을 창조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20세기 우리 미술의 대표 선수를 고른다면 한국화에서 청전, 양화에서 박수근일 수밖에 없"으며 "청전이 없다면 20세기 한국화는 얼마나 허전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나는 청전에게 그저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올리고만 싶다"고 했다.

그저 그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림 속의 점이 되고 산과 물이 되어 끝내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붓은 그 자체로 자연이고 평화로운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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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 ⓒ 대한민국예술원 홈페이지

한편 그의 이름은 또 다른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1936년 소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그는 동아일보 학예부 미술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체육부 이길용 기자 및 후배 화가 정현용과 함께 공모하여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가슴에 찍힌 일장기를 지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을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2층 편집실에서 사환 아이가 한 장의 사진을 들고 왔다. 이어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구내전화로 나를 불렀다. 사진의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좋다고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 붓을 들어 일장기 위에 흰 물감을 칠했다. 그런 다음 종이에 싸서 동판부에 보냈다… 그날 저녁 술을 먹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집사람이 '사환 아이가 오는 대로 신문사에 들리라고 했다'고 전했다… 편집국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들의 얼굴이 새하얗다. 경찰들이 신문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경기도 경찰부로 연행됐다." - 청전 이상범 홈페이지

결국 이 일로 그는 40일간 구속되었고, '언론기관에 관여치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렇게 그는 동아일보를 떠났다.

여기서 그의 삶을 더듬어 보자. 그는 충남 공주 벽촌의 빈농 출신이었다. 열 살인 1906년 보통학교를 겨우 마쳤으나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이라 그가 찾은 곳은 학비가 없는 경성서화미술회 강습소였다. 여기서 안중식에게 전통 화법을 익혔다.

하지만 서화미술회는 1919년 안중식이 3.1운동에 연루되어 옥고 후유증을 세상을 떠나자 운영이 어려워졌다. 이후 이상범은 우리의 근대적 민족미술을 세우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청년 이상범이 이렇게 민족의식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신 배경과 3.1운동으로 숨진 스승 안중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랬던 청년 이상범도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을 통해 노골화되는 군국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이제 '예술도 군수품'이라는 전시문화정책에 동조하며 일제 문화정책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앞서 살펴 본 노천명이 글로써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다면 이상범은 그림으로써 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가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만큼 컸기 때문에 지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그의 이름과 친일행위 내용이 등재되었다.

한 인간의 행위가 모두 완벽하고 정의로울 수만은 없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그릇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지나친 듯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좌우익을 모두 아우르는 미술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일제강점기 이상범처럼 총독부 기관지던 <매일신보>에서 기획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의 시화에 함께 그림으로 총독부에 화답했던 고희동, 노수현 조차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상범을 비롯한 김은호,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배운성, 송정훈 등 친일활동 이력이 뚜렷한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최고의 거장이란 평가를 받았음에도 살아생전 개인전 한 번 갖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단신의 작은 체구에 겸손하고 소탈하며 다정다감하면서도 엄격성이 깃든 인품이라고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얘기된다.

그리고 술을 즐긴 애주가에 재기 넘치는 재담가로 유명하고, 주변과 무리없는 친화력이 커다란 장점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에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대표적인 한국의 소시민'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친일활동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그의 예술적 성과, 수묵화의 거장으로만 기억될 뿐. 물론 이상범 생전에 자신의 양심고백도 없었다. 거장의 이런 행동은 우리 미술계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순수미술은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친일옹호론자들의 말처럼 지금 우리 시대의 예술 세계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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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의 집(막다른 골목 집)과 같은 골목의 위의 집은 지난 해 세상을 떠난 천경자 화백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머물던 집(왼쪽 가운데 기와집)이다. ⓒ 유영호


참고로 청전 이상범의 집 바로 맞은 편 집(누하동 177번지)은 또 다른 미술계의 거장 천경자(1924~2015)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인 1998년까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강렬한 원색과 도발적 소재로 국내 미술계를 휘저으며, 숱한 스캔들로 화재를 뿌렸던 여류 거장이 바로 앞에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흥미로웠다.

천경자는 1991년 일어난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말미암아 창작 활동에 파탄을 맞았다. 자신은 그린 적이 없다고 했지만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국립중앙미술관과 화랑협회의 오만함에 질린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 숱한 소문을 만들어냈지만 2015년 8월 뉴욕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사라졌다.
#청전 이상범 #서촌기행 #일장기말소 #백운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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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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