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으뜸인 두 남자, 그들의 의리

[디카시로 여는 세상 - 시즌2 중국 정주편 ⑫] <시성(詩聖) 두보>

등록 2016.05.02 09:40수정 2016.05.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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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석상 ⓒ 이상옥


                              


중국 거대 대륙,
한쪽 귀퉁이를 붙들고 있는
- 이상옥의 디카시 <시성(詩聖) 두보>

중국 정신문화의 정화는 이두(李杜)다. 오늘의 G2 중국이 흔들림 없이 중심축을 지탱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거대 대륙의 양쪽 귀퉁이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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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고리(杜甫故里)’라고 쓴 현판이 달린 두보 고향 기념관 입구를 통해 거대한 두보 석상이 보인다. ⓒ 이상옥


중국 정주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 가면 공의시 '두보고리(杜甫故里)'가 있다. 두보의 고향에 있는 두보의 고향기념관은 우선 방대했다. 두보가 평생 유랑하며 그리워하던 두보고리! 

春來萬里客/ 亂定幾年歸/ 腸斷江城鴈/ 高高正北飛

"봄에 와 있는 만 리 밖의 나그네는 난이 그치거든 어느 해에 돌아갈까? 강성의 기러기 똑바로 높이 북쪽으로 날아가니 애를 끊는구나." - 두보의 <歸鴈>(귀안)


두보가 안록산의 난으로 유랑 생활을 하던 53세 봄 피난지에서 지은 것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고향 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마음이 선연하다.

당나라 현종이 측천무후 이후의 혼란스러운 나라를 평정하고 선정을 베풀어, 당 왕조는 중흥을 이뤄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당 태종의 '정관의 치'와 비견하여 '개원의 치'(개원은 현종이 712년 즉위한 이듬해에 제정한 연호)라 이른다. 현종이 개원의 치를 이룰 때 당나라 수도 장안(지금의 서안)은 인구가 900만 호였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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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년관 내에는 이백과 두보가 함께한 이두상이 있다. ⓒ 이상옥


현종 때 이백, 두보 두 거성이 동시대를 함께 했다는 것도 참으로 축복이다. 이백은 현종에게 잠시 총애를 받으며 중용의 기회를 얻었으나 양귀비를 비난하는 시를 지었다고 해서 쫓겨나 장안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때 두보와 만나서 둘은 형제처럼 하남, 산동 일대를 여행하며 시를 짓고 즐거운 시간을 잠시 보내기도 한다. 

동시대를 함께하며, 형제의 우의를 나눈 이백과 두보

현종은 양귀비에 점점 빠져들면서 국정을 등한히 하면서 총명을 잃고 간신을 등용하게 되고, 결국 정치는 문란해지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는 등 당나라는 급격히 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두보도 반란군에 체포돼 장안에 유폐됐다. 겨우 도망쳐 당시 숙종 황제에게 가서 충언을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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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두보가 나무에 오르며 놀았던 형상을 재현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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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토굴을 파고 사람들이 살기도 했다는데, 두보가 태어난 탄생굴 표지석. ⓒ 이상옥


이백이나 두보 모두 정치에 뜻을 뒀지만, 둘 다 그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아마, 이두가 모두 중용되었다면, '시선' '시성'이라는 칭호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보는 잠시 말단 관리로 있기도 했으나 대부분 유랑 생활을 하며 궁핍한 가운데 시와 술만이 위안이었다. 만년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다 호남성 악양 부근 강에 떠 있는 낡은 배 안에서 병사했다.
덧붙이는 글 올 3월 1일부터 중국 정주에 거주하며 디카시로 중국 대륙의 풍물들을 포착하고, 그 느낌을 사진 이미지와 함께 산문으로 풀어낸다.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감흥)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공감을 나누는 것을 지향한다
#디카시 #두보 #이백 #두보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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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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