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 가전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메틸 알코올 - 유해물질'이라고 쓰인 분무기를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선대식
파견노동자들의 시력을 빼앗은 바로 그 화학물질이다. 분무기에는 '흡입 : 필요시 인공호흡', '피부접촉 :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물로 세척', '눈 접촉 : 즉시 씻을 것', '섭취 : 의식이 있고 경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구토를 야기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당시는 시력을 잃은 파견노동자로 인해, 화학물질 산업재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때다. 하지만 회사는 내가 사용하는 물질이 메탄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당연히 마스크, 고글, 화학물질용 안전장갑과 같은 개인보호장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눈·코·입 등 신체는 고스란히 메탄올에 노출됐다.
얼마 뒤, 나는 다른 업무를 배정받고 맞은 편 라인으로 옮겼다. 내 자리에는 내 옆에 있던 재중 교포가 차지했다. 그는 연신 분무기 손잡이를 힘껏 눌러 가전제품을 닦았다.
그나마 내가 있는 라인은 나은 편이었다.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품질 검사를 하는 라인은 더욱 열악했다. 그곳에서는 지독한 메탄올 냄새가 났다. 나야 잠시 위장취업을 했지만,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매일 메탄올을 흡입했을 것이다.
안전보건공단은 메탄올 중독사고가 발생하자, 화학물질 안전보건관리 십계명을 발표했다. 십계명 중에서 내가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것은 6가지였다. 이중에 실내작업장에서의 흡연·취사 금지를 제외하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비치, 노동자에 대한 교육 실시, 화학물질 발산원 밀폐, 개인보호구 지급, 세척시설 설치 등은 없었다.
파견노동자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산업재해와 직업병의 위험 속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 환경은 정말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을 두 달 앞두고 전국이 들떠 있던 그해 7월 2일 15살 소년이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이름은 문송면. 중학교 졸업반이었던 1987년 12월, 밤에 공부를 시켜준다는 서울 영등포 온도계 제조공장에 취업했다. 두 달도 안 돼 몸이 아파 휴직했다. 설 때 내려간 고향에서 눈이 뒤집힌 채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수은 중독 때문이었다. 문송면은 끝내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20일 뒤 정부가 관리하던 회사인 원진레이온의 노동자들이 독성물질인 이황화탄소에 중독돼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목숨을 잃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가족들은 긴 싸움 끝에 직업병 환자들을 위한 재단과 병원을 설립했고, 이는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줄이려는 사회적인 노력으로 이어졌다.
문송면이 죽고, 원진레이온의 지옥이 세상에 알려진 지 28년. 여전히 공장에서는 눈이 멀고,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파견노동자들은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돼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가운데 산업재해 사망률 1위다. 산업재해는 언제쯤 이 땅의 공장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송경동 시인은 2013년 문송면 사망 25주기를 맞아 쓴 시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에서 "당신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해졌다고 공치사를 해야 하나"라면서 아직도 열악한 노동 현실을 자조했다.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28살의 여성 파견노동자는 뇌손상으로 인지·언어장애도 겪고 있다. 그가 다니던 회사는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메탄올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거짓 보고했고, 노동부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파견노동자로 일한 대가는 끔찍한 산업재해였다. 산업재해의 휴업·장해급여를 산정할 때 기초가 되는 것은 그가 받은 평균임금이다. 최저임금을 받은 파견노동자는 가장 낮은 휴업·장해급여를 받는다.
우리 사회는 그에게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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