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 군대에서 '한강'을 만났다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끝내 저항하는 주인공... 한강이 그리는 '냉담한 위로'

등록 2016.05.24 12:11수정 2016.05.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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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가가 있다.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신뢰함을 넘어서, 강한 유대감이 느껴지는 작가. 마치 이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아, 작품 속 인물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 내가 가진 고민, 내가 겪었던 고통을 마치 들여다본 것처럼 작품 속에 그것을 느껴내는 작가.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이야기에 나를 이입하게 되고 위로를 받게 하는 그런 작가. 아마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작가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그 작가는 한강이다.

한강과 내가 처음 만난 순간


한강,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 수상 쾌거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맨부커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맨부커상선정위원회는 16일(현지시간) 밤 영국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 겸 시상식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한강,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 수상 쾌거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맨부커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맨부커상선정위원회는 16일(현지시간) 밤 영국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 겸 시상식에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연합뉴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채식주의자> 중

처음 한강을 만났던 때는 내 인생에서 다소 특이한 때였다. 나는 군대에 있던 시절, 한강을 처음 만났다. 물론 군대에서의 시간이 항상 부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게 그 시절을 한 단어로 요약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내가 고를 단어는 '폭력'이다.

내게 군대는 폭력으로 가득한 공간이며, 오히려 그 폭력이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누군가에게 손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 계급으로 정당화되는 곳.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효율과 기강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던 곳.

물론 그것이 개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폭력성이란 군대 조직 문화에 내재한 것이었다. 어쩌면 누군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 사항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고통받던 개인은 계급이 오르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힘을 휘둘러 조직을 유지하도록 요구받는 식이었으니까.

군대에서는 권력을 가지고도 오히려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저항이었다. 나에게 그런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내가 딱히 윤리적인 인간이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통에 예민했던 나는 폭력의 대상이었던 시절 무척이나 힘들었다. 때문에 그러한 폭력이 어떤 식으로든 내 몸을 관통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시절 만났던 책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그 시절의 나는 글의 초반부터 주인공인 영혜에게 이입했다. 사실 책의 첫 장에서 영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그녀는 브래지어가 불편해 입지 않겠다고 했고, 고기를 거부하고 채식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브래지어를 하고 육식을 하는 것이 정상인 공간에서, 그녀는 손쉽게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물론 소설 속 영혜의 채식이 내가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고기 먹지 않음'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그녀의 채식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강렬한 폭력의 경험이 엮여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사고로 큰 개에게 물렸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 개가 죽을 때까지 오토바이에 매여 걷게 하는 식으로 응징한다. 그리고 그 개를 그녀에게 먹인다. 말하자면 내게 영혜의 채식이란 그 개의 고통과 저질러진 폭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같은 은유는 영혜에게 그녀의 엄마가 건네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네 꼴을 봐라,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다른 방식의 저항

 소설 속 영혜의 행위는 그저 채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어쩌면 먹고 먹히는 것이 당연한 것, 그렇게 폭력을 순환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영혜의 행위는 그저 채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어쩌면 먹고 먹히는 것이 당연한 것, 그렇게 폭력을 순환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른다.블루트리픽쳐스

"닥쳐. 도취하지 마. 앞지르지 마. 그녀들은 당신이 원한 것만큼 약하지 않았어."

<바람이 분다, 가라> 중

이런 맥락에서 소설 속 영혜의 행위는 그저 채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어쩌면 먹고 먹히는 것이 당연한 것, 그렇게 폭력을 순환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의 또 다른 장점은 이러한 영혜를 그러한 시스템과 무관한 사람, 원래 그러한 사람이어서 상징적인 의미만 가질 뿐 아무런 생기를 가지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 속에서 영혜는 고기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첫 장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한 마리의 새를 물어 죽이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 그녀는 식물이 되는 것을 꿈꾼다. 마치 자신의 몸에 새겨진 폭력성까지도 거부하려는 것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평한다. 한강의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은, 기성 많은 이들이 문제시한 수동적인 여성상의 답습이라고. 한국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거나 폭력을 되돌려주지 못한다고. 너무 쉽게 처벌되어 버리거나 교화되거나, 혹은 자신을 파괴하는 식으로 나아간다고.

확실히 어떤 맥락에선 그러한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한강의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은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폭력을 거부하거나, 혹은 저항을 해도 무력하게 진압되어 버리곤 하니까. 누군가를 물어도 시원찮을 판에 폭력을 거부하겠다니. 거기에 나아가서 아예 식물이 되어버리겠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이 단지 '수동적인 여성'으로만 갈무리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저항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소년이 온다>의 한 장면이 매우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광주에서의 학살에 관한 연극을 공연하려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연장에는 배우들이 광주에 대해 한마디 말이라도 내뱉는지 감시하는 경찰들이 등장한다. 이 상황에서 배우들은 입 모양으로는 대사를 읊되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이 행위를 무력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소리도 공기를 타고 흘러 사람들에게 닿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들이 마냥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인지 모를, 하지만 지금 이곳과는 다른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해 온 한강의 책들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해 온 한강의 책들신필규

<채식주의자>의 영혜에게도 나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이를 거부하겠다는 것은 엄청난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혜는 스스로 식물이 되겠다는 식으로, 이 같은 저항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 때문에 이 캐릭터가 외견상 유약하고 취약하다고 해서, 수동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익숙한 방식의 폭력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강인한 것인가.

지배적인 사회 체제가 띠는 폭력성, 그것에 편승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편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그 거부를 관철하는 것이야말로 강인한 일이다. 아니 강인하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다. 한강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강인함'이라는 단어로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저항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한강의 책을 보고 나면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부서질 듯한 사람이 세찬 풍파를 뚫고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그러는 과정에서 부서지고 바스러지길 반복하지만 기어서라도 그 길을 계속 나아가는 모습. 한강의 소설은 주인공들이 중간에 결국 부서져 주저앉거나 종착점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주인공들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밀고 나간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23살 군대에서 폭력이라는 것에 몸서리를 쳤던 나에게, 그리고 전역을 하고 나서도 군대 밖의 세상이라고 딱히 다르지는 않음을 깨닫게 된 나에게, 그리고 때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자신을 보며 슬퍼했던 나에게, 한강의 작품들은 특별했다.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꾸는 나에게 그녀의 작품은 모호한 답변이었다.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 고통스러운 나에게 그녀의 작품은 '세상은 원래 그렇고, 우리는 이렇게나마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냉담한 위로와도 같았다.

어쨌거나 한강의 주인공들은 바람을 등지지 않고 마주하며, 거친 길목을 밀어버리지 않고 그 길을 걸으며 움직일 것이다. 어디인지 모를, 하지만 지금 이곳과는 다른 어떤 곳을 향해. 마지막으로 한강의 책 중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을 공유하고 싶다.

"두 눈을 흡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

<바람이 분다, 가라> 중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창비, 2014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창비, 2007


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0


#한강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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