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가 남긴 것: 이제, 패턴이 보인다

등록 2016.05.25 10:38수정 2016.05.2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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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수많은 재앙을 겪어 왔다. 먼 시대를 따지면 한국전쟁부터 시작하겠고, 비교적 근래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사건 등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강남역 살인 사건, 세월호 참사, 해병대 캠프 사망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도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 특히 대형 참사는 한 사회에 있어서 크나큰 비극이다. 그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는 점에서 비극이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빈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은 무엇일까. 망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이 첫 번째다. 하지만 향을 피우고 돌아서면서, 이 참사를 만들어낸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를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에서 무언가를 배우지 못한다면, 또 다른 죽음을 만들어낼 뿐이다.

하지만 그간 우리 사회는 참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참사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졌는가. 바뀐 것은 많지 않았다. 당장 세월호 사건만 보자. 해경의 소속 변경과 국민안전처의 등장 외에 무엇을 바꿀 수 있었던가?

그렇다면 참사가 발생했을 때,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었던가? 그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문제를 지적했고, 바뀌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을까.

최근 몇 번의 참사를 목격하며, 왜 참사의 결론이 그렇게 허망했는지, 그 패턴이 이제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1. 참사가 발생한다.


우선 참사가 발생한다. 세월호 참사일 수도,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일 수도, 강남역 살인사건일 수도 있다. 사람이 사망하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 죽음 앞에 애도를 표하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여기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2. 사회적 문제가 지적된다.

사건이 발생하고 시간이 조금 흐르면, 사람들은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모든 참사라는 것이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있으므로, 여기까지의 문제 제기는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문제 제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고, 대체 어떤 문제가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었는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안전 문제가 대두된다. 대체 왜 배가 침몰하고 신고가 접수되었는데도 사람을 구하지 못했는가? 며칠 동안 생존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배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후화된 배를 허가해준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책임을 방기했다고 볼 수 있다.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여성혐오 (misogyny)'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범인이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밝힌 만큼, 여성들의 안전, 나아가 사회적 차별 문제까지도 제기되어야 한다.

해병대 캠프 사건에 대해서는 '극기'와 '군기'를 강요하는 사회를 지적할 수 있다. 명령에 복종하고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인간을 단순히 '적응하는 원숭이'로 만들려는 교육을 지적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도 마찬가지다. 옥시를 넘어서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는 기업문화 전체를 지적해야 하고, 서울대 교수의 구속으로 상징되는 학계와 기업의 결탁 관계도 지적해야 한다. 감시 책임을 소홀히 한 정부의 문제도 지적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수많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사건과 직접 연관된 문제일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참사를 계기로 다양한 문제가 떠오르고,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3. 문제 제기가 행동으로 분출된다.

단순히 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 제기가 해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나서서 추모집회를 연다. 광화문에 천막을 치기도 하고, 서명운동을 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대통령이나 국회 앞에서 항의를 하기도 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경우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강남역 앞에 모여 포스트잇 등으로 추모 의사를 전했다. 여성혐오적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 단계에 오면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진다.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도 유사하다. 사람들은 옥시 불매운동을 시작하고, 대형마트에서 옥시를 추방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과를 받아내기도 한다.

여기까지도 역시, 사회가 문제를 제기하는 아주 정상적인 작동 기제다.

4. 문제 제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행동에 나섰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언제든지 그 문제를 이용해 이익을 보던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꼭 이익을 보진 않았더라도, 그 문제가 제기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를 팔아서 기업들은 상당한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문제 인정이나 배상도 웬만하면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조차 회사에는 손해일 테니까. 그들은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며, 최대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소망한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로 인해 박근혜 정부가 이익을 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세월호 참사로 국가에 제기되는 비판은, 박근혜 정부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이끌던 정부가 아주 거대한 결함을 품고 있다는 의미니까.

여성혐오적 사회로 인해 이익을 보던 사람은 더욱 광범위하다. 어찌 보면 남성 전체가 그 이익을 보고 있는 셈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보던 이익을 파괴하려는 여성들의 행동이 불편하다. 자신들을 향해 제기되는 문제가 불쾌하다.

이들이 보던 이익은 사실 사회의 문제를 통해 얻어낸 부당한 이익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이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한참 동안 당연하듯이 얻어낸 이익이니까 말이다.

5. 이제 그들이 저항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저항을 시작한다. 참사에서 비롯된 사회 문제 제기를 '정치 싸움'으로 몰기 시작하고, "순수한 목적으로 추모만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참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순간, 자신이 누리던 권리를 잃어버려야 하므로.

남성들은 '남성혐오'를 외치며 강남역 추모 공간에 나오게 되고, 보수 세력은 '폭력 시위'라며 세월호 추모 집회 현장에 등장한다. 이들은 문제를 축소시키려 애쓴다. 세월호 사건은 유병언과 청해진해운의 문제고, 강남역 살인 사건은 살인자 한 사람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6. 충돌이 시작된다.

이제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만들어졌다. 두 세력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인터넷 등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언어적 충돌일 수도 있고, 실제 물리적으로 벌어지는 충돌일 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오고 행동했다. 이에 각종 보수 단체는 '맞불 집회'를 예고하며 반발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투쟁에 대응한 '일베' 회원들의 '폭식 투쟁'도 있었다.

강남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베' 등 보수 시민들이 강남역 앞으로 직접 나오기 시작했다. 피케팅도 있었고, 물리적인 충돌도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추모 공간에 나타난 시민이 포스트잇을 붙이지 못하게 막기도 했고, 대구에서는 흉기를 소지하고 있던 시민이 체포되기도 했다. 분홍색 코끼리가 추모 현장에 등장한 사건도 있었다.

이것은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사회가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민주주의의 발전 동력은 논쟁이니까 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만큼, 딱 그만큼 세상은 진보한다.

이런 행동이 폭력으로 격화되기도 한다. 이 폭력이 반드시 부당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특히 그 저항의 대상이 국가 권력일 때, 본인이 그 책임을 질 수 있다면 폭력으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시민 불복종'이다.

물론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합리화될 수 없는 폭력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도한 폭력이라든지,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가해지는 폭력은 분명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문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7. 언론이 충돌만을 부각한다.

여기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은 "사람들이 대체 왜 충돌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늘은 얼마나 자극적인 충돌이 발생했는가?" 혹은 "누가 어떻게 상대방을 괴롭히고 있는가?"를 묻는다. 클릭수를 높일 수 있는 자극적인 제목만을 뽑아낸다.

세월호 추모 집회 현장에서 벌어진 폭력에 대해서만 논한다. 유가족의 울분과, 경청하지 않는 정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강남역에서 벌어진 물리적 충돌만을 논한다. 여성혐오적 사회와 성적 불평등 사회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안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반복한다. 기계적 중립의 함정에 빠진다. 일부 과격해진 현장에 대해서만 이야기가 나온다. 일부의 비이성이 모두를 대변하기 시작한다. 일부의 사례는 전체로 와전되고, 일반화된다. 세월호에 대해 슬퍼하면 폭력 집단이 되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면 파시스트가 된다.

특히 직접 현장에 나올 의지도 마음도 없는 사람들은, 뉴스 기사만을 보고 상황을 판단한다. 기사 한 줄이 시민 수만 명의 행동을 대변한다. 그렇게 혼란만이 부각된다.

8. 사건과 사회 문제의 본질이 사라진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참사와, 그로 인해 제기된 사회 문제를 망각하기 시작한다. 폭력과 혼란만이 머리에 남는다.

'세월호'라는 이름을 듣고, 300명 넘는 죽음에 슬픔을 표하는 대중이 점차 사라진다. 집회에서의 충돌, 차벽, 물대포가 머릿속에 남는다. 사회의 안전 문제를 생각하는 대중도 줄어든다. 이제 세월호는 일상이 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세월호 유가족이 얼마나 많은 배상금을 받았느냐에만 집중된다.

강남역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살해당한 여성을 안타까워하는 대중이 없어진다. 언론에 의해 재단된 '남혐'과 '여혐'의 프레임만 머릿속에 남는다.

사회 문제를 생각하는 대중이 사라진다. 자극적인 기사 한 줄 쯤이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다.

9. 지겹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흐른다. 꽤나 긴 시간을 하나의 이슈가 독점한다. 사람들은 이제 무뎌진다. 슬픔을 느끼던 시민들도 이제는 덤덤해진다.

이제 '지겹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언제까지 이 이슈에 천착할 거냐는 주장이 나온다. 이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그럴 듯 해보이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울분만 남기고 가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되면 논쟁과 대립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논쟁이 거듭될수록 논쟁에 참여하려고 하는 사람들 자체가 줄어든다. 사람들은 관심 자체를 거둔다. 언론에서도 이야기가 사라진다. 더 이상 참사에 관심을 보내는 사람조차 남지 않는다.

10.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이제 사건은 끝을 맺는다. 세상이 조용해진다. 더 이상 싸울 동력과 의지를 얻지 못한다. 피해자의 울분은 쌓이지만 누구도 그것을 해결해 주려 하지 않는다.

사회 문제의 해결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적폐는 조금씩 더 쌓여가고,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던 이들은 그대로 다시 이익을 가져간다. 세상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고, 참사의 가능성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져간다.

참사는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세상은 성장의 동력을 잃는다.

이제 아주 뻔한 패턴이다. 이슈를 점령하고 대중의 관심을 먼 데로 돌려버리는 아주 전형적인 방법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구시대적인 방법론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목소리가 힘을 얻기 위해서, 이제 이 전형적인 순서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강남역 살인사건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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