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찢어낸 단경왕후의 '치마'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24]

등록 2016.06.09 17:03수정 2016.06.0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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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사랑이 깃든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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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본 인왕산. 그 정상 밑에 넓게 펼쳐진 바위가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이 전해지는 일명 '치마바위'이다. ⓒ 유영호


수송동계곡 뒤편으로 인왕산 정상이 보이고 그 아래로 속칭 '치마바위'라고 불리는 넓은 바위가 펼쳐져 한 눈에 들어온다. 이처럼 바위 이름이 치마바위라고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 중종반정과 관련된 전설에 유래한다.


당시 반정군은 연산군을 끌어 내리고, 그 친위세력인 신수근 형제를 역적으로 처단한 뒤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을 임금(중종)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실의 복잡한 친인척관계였다. 역적으로 처단된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아내였지만, 딸은 연산군 이후 추대된 중종의 아내였다. 그러고 보면 자기 여동생과딸을 왕비로 둔 신수근은 대단한 외척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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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중종의 가계도와 외척 신수근의 관계 ⓒ KBS 역사저널 '그날'


이런 가족관계로 인해 진성대군의 아내인 신수근의 딸은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 신수근은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졸지에 역적의 딸이 왕비가 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정세력들은 역적의 딸을 폐위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중종 역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왕비가 된 단경왕후 신씨는 고작 7일 만에 폐비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산군과 중종의 비 모두 폐비가 되었다. 연산군의 비야 어쩔 수 없었지만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조차 궐에서 쫓아낸 중종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중종은 단경왕후를 그리워하며 그가 머물고 있던 사가를 향해 눈길을 자주 돌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단경왕후는 자신의 치마를 인왕산 바위 위에 임금이 볼 수 있도록 걸어 놓은 것이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이런 애틋한 사연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바위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사연 때문인지 맑은 날 이 바위를 바라보면 연분홍 빛을 띠어 곁에 있으면서 만날 수 없는 연인들의 슬픔이 느껴진다.

1939년대 일본청년대회 기념 각자

하지만 이런 애틋한 남녀사랑 이야기도 조선시대로 끝난다.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 땅에 더 이상 그런 낭만적인 상상을 허용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다.

1915년 일제의 식민정책 홍보를 위해 '시정오년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함으로써 궁궐전각은 파괴되기 시작하였고, 1926년 급기야 거대한 총독부건물을 세워 경복궁을덮고 말았다. 또 총독부 전면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워 우리민족의 정기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일제의 서울 파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며 이곳 인왕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대륙침략전쟁의 속전속결을 위해 모든 역량을 중국 화북전선에 집중하는 한편 조선은 후방기지로써 전시동원체제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1939년 가을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치마바위 위에 이를 기념하는 글씨를 새겨놓았다(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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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치마바위에 새겨진 대일본청년단대회 기념 글자 흔적들 ⓒ 유영호


이곳에 새겨진 글자는 오른쪽부터 그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줄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둘째줄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황기2599년 9월 16일)
셋째줄 :朝鮮總督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네째줄 : 작은 글씨로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각자를 남기는 연유를 서술한 내용이 잔뜩 새겨져 있었으며, 그 말미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토키사부로(鹽原時三郞)'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문구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인왕산에 새겨진 이유는 이곳이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한편 이러한 기념각자의 의도를 당시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기념문자로서 신동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상징이 되게 하며 이 글자를 생각함으로써 동아(東亞)의 오족(五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이다."(1939년 9월 7일자 매일신보)

나라를 빼앗기니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이 깃든 이 바위조차 제국주의 깃발 아래 조선청년들을 대륙침략의 총알받이로 몰아넣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된 뒤 서울시는 이곳 치마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1950년 2월 서울시에서 '민족정신 앙양과 자주정신 고취에 미치는 바 영향이 많다고 하여 82만 원을 들여 삭제 공사를 하여 정확히 알아볼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우리민족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치마바위 #서촌기행 #수성동계곡 #중종반정 #대일본청년단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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