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부탁해> (김은식 글 / 임종길 그림 / 나무야 펴냄 / 2016. 5 / 157쪽 / 1만2000 원)
나무야
하지만 이 빈터에 무와 배추를 심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씨앗을 종묘상에서 사다 심었다. 그런데 알타리무도 그렇고 얼갈이배추도 그렇고 씨앗이 희한하다. 고운 하늘색 빛깔이 너무 아름다웠다.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무씨나 배추씨가 아니라서 종묘상 주인에게 물었다.
"이게 왜 이래요? 무씨와 배추씨 맞아요? 제가 아는 씨앗 색깔이 아닌데요?""네, 맞아요. 요샌 다 그렇게 나와요. 뭔 처리를 했다고 하던데. 농약이 묻어서 그런 색깔이 나는 거예요. 약품 처리를 했기 때문에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아요."그때는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다는 말이 그렇게 은혜롭게 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씨앗은 발아할 수 있는 종자가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고로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워야 한다. 하지만 종묘회사에서 조작한 씨앗은 한해살이만 가능하다. 씨앗을 받을 수도 없고 혹 씨앗을 받았다 해도 발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농사법은 달랐다. 무를 가을 내 놔두면 쫑이 나고 꽃이 핀 후 알알이 씨앗을 맺었다. 그 씨앗을 받아 고이 싸두었다가 오는 봄에 땅에 뿌렸다. 그렇게 순무랑 배추 등을 키워 먹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모든 씨앗은 종묘상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다. 종묘상의 씨앗은 약 처리를 해 다음해를 기약할 수 없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인 대형종묘사의 음모가 있다. <씨앗을 부탁해>는 농부의 농사법을 완전히 갈아치운 대형종묘회사들의 음모를 알려준다. 몬산토, 카길 등 대형종묘회사들은 더 이상 식물에서 씨앗을 채취할 수 없게 만들고, 씨앗을 사다 심는 시스템을 통하여 폭리를 취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담속찬>에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썼다. 하지만 현대의 농부는 베고 죽을 씨앗도 없다. 모든 씨앗은 씨앗을 독점한 종묘회사들의 창고에만 있다. 종자 주권을 상실한 채 농사를 짓는 게 현대 농부의 현실이다.
'금값'이란 말이 있다. 배추가 흉년인 해는 '배추가 금값'이라고들 떠든다. 하지만 금값보다 더 비싼 씨앗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금 한 돈(3.75g)은 18만 원 정도다. 그런데 파프리카 씨앗은 금 한 돈 무게인 3.75g에 최대 45만 원이나 한다. 금 두세 배가 되는 꼴이다.
종자가 산업 논리에 묻혀 사라지고 있다파프리카는 토종이 아니니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토종인 청양고추는 좀 다르다. 하지만 청양고추나 토마토 등 토종들이 이미 외국 회사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물이라고 여기는 청양고추 씨앗도 미국 종묘회사인 몬산토에서 해마다 로열티를 내고 사오고 있어요. 그 씨앗을 처음 개발했던 중앙종묘라는 회사가 몬산토에 팔려 버렸기 때문이지요. (중략) 로열티는 어느덧 200억 원이 넘는다고 해요. 2001년에 5억 원 정도이던 것이 2020년 무렵이 되면 3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본문 29, 30쪽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작은 종묘회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에 거의 잠식된 상태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토종인 농산물을 외국 기업에서 사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토종을 심고도 로열티를 지불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하루아침에 씨앗이 '상품'으로 둔갑한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토종 작물들이 씨앗을 남기지 못한 채 하나 둘씩 잊히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
'터미네이터 씨앗'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영화 <터미네이터>(1984, 제임스 카메론 외)에서 기계인간 터미네이터는 사람을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 용광로로 들어가 사라지게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F1 씨앗'이라고 해서 1대 잡종씨앗으로만 존재하고 2대는 생산할 수 없게 만든 씨앗을 '터미네이터 씨앗'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