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이치 정상에 세워져 있는 '무민공 황진 장군 이현 대첩비'의 비문 전문이다. 물론 비 자체에 새겨져 있는 원문을 사진으로 찍어와 옮긴 것이 아니라, 비 옆 안내판에 적혀 있는 것을 재현한 것이다. 문단 구분과 띄어쓰기가 없는 것은 대첩비에 새겨진 원문 자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 이현은 지금 약 400년 전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바로 그해 8월 30일(음력 7월 9일경) 동북현감 황진 휘하의 아군이 당시 바야흐로 전주를 침공하고자 상주 금산을 거쳐 대거 남하하던 왜군을 맞아 일대 격전을 벌인 곳이요, 격전 끝에 가위(可謂) 역사적인 대첩을 올려 호남을 궤멸의 직전에서 구하고, 호남을 구함으로써 후일의 조국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주장의 뛰어난 전략과 변화무쌍한 선전, 그리고 동복인 공시억, 장흥인 위대기, 전주인 황박, 남원인 소제 등 장군 막하 제 의사들의 용전이 크게 주효하여 그와 같은 대승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의 총기획관은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 장군이었다. 데저 저 천하무도의 침략광 풍신수길의 명하에 호왈 수륙 이십 만의 왜군이 이백 년 태평 속에 전쟁을 모르고 전비가 전무한 우리의 강토를 급습, 부산포에 나타난 것은 이 해 4월 13일, 다음 양일 간에 부산, 동래를 연이어 함락시킨 후 북상을 계속하여 상주, 충주의 방어선을 일거에 무너뜨린 저들은 5월 3일에는 이미 수도에 입성하였으며, 3일 전 이른 새벽에 황망히 북행 길에 오른 국왕 일행을 뒤쫓아 6월 15일에는 멀리 평양에까지 북상하여 의주의 피란 조정을 극도의 불안 속에 몰아넣었다. 조야가 최후의 보루로 믿었던 함경도도 7월 초에는 무너졌으며, 이제 조정이 당장 택할 수 있는 길은 명에의 원군 요청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호남 충의지사의 봉기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과연 호남은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물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명도 우리의 요청을 수락, 지원군을 파견하여 평양을 탈환하는 등 한때 전세를 만회하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호남에서는 전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우국충의지사들이 혹은 순수한 독서사인의 자격으로 혹은 전직 관리 또는 현직 수령으로서 각지에서 분기, 창의의 기치 아래 많은 관군 및 의병을 결집하여 왜적과의 싸움을 전개하였으며, 이현에서의 승전은 바로 그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위와 같은 위난의 상황 하에서 올린 장거였던 것이다. 그것도 비록 해상에서는 그간 옥포, 당포, 율포 등지에서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승전이 계속되었으나 육전에서는 전쟁 발발 이래 근 3개월 동안을 거의 패전의 연속으로 몰리던 차에 올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 이현은 그 전략상의 위치로 보아 여기에서 무너질 경우 호남은 일거에 적군의 말굽 아래 짓밟히게 되고, 그렇게 되었을 경우 당시의 전세로 보아 조국의 재흥은 어쩌면 거의 무망하였을 그러한 요충지였으며, 그러기에 영남을 휩쓴 왜군의 일지가 처음에 웅치 공격을 시도하였고, 여기에서 위 황공을 포함한 우리측 제 의사들의 항전에 부딪쳐 실패하자 바로 이어서 이번에는 보다 많은 군세를 투입하여 이곳을 공격하였던 것이 아닌가. 당시 전란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나 후세의 사가들이 한결같이 다 이현의 승전을 역사적인 대첩이라 평하고, 그 승전의 주장 황진을 뛰어난 무장으로 추대하였던 이유도 다 이러한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황공은 이듬해 6월의 저 유명한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의 명장으로서의 이름을 남기지만, 그의 명장으로서의 진가는 이미 이현전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 싸움이 끝난 후 공이 동복 임지로 가기 위하여 전주를 거쳐 갈 때 시민 남녀노소가 제각기 음식을 손에 들고 앞을 다투어 연도에 나와 이 분이 아니었던들 이 지방 생령들은 온통 몰살당하였을 것이라 하며 감격의 눈물로 영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거니와, 이현전 1년 후인 계사년 말에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이정암이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충청병사 황진은 용무가 초군하고 여력이 과인하였는 바 웅치전에서는 왜적의 전봉을 꺾었고, 이현의 격전에서는 이모제중의 공을 올렸습니다. 금산의 적이 전주를 침범하지 못한 것은 모두가 이 사람의 힘이었습니다.' 라고 한 사실이라든가, 남원인 조경남, 보성인 안방준과 같은, 직접 전쟁을 겪고, 또 전선에서 싸우기도 한 이 지방 학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엄격한 사필로 유명한 우산 안방준은 1618년에 편찬을 마친 그의 <호남의록>에서 말하고 있다. '난이 일어나자 동복현감 황진은 즉시 열읍 관병과 더불어 각처 요지에 분거, 영남으로부터 호남으로 들어오는 왜적을 차단하였으며, 하루는 적 수천여 기가 웅치에 밀어닥치는지라 선등돌출, 저들의 전봉 수십을 사살하여 이를 물리쳤고, 곧이어 적군이 이번에는 이현에 대거침입, 총환이 빗발같고 천지가 진동하매 제장이 퇴축하는데 유독 공은 위대기, 공시억 등 약간 인과 더불어 종일 역전, 적환을 다리에 맞아 유혈이 임리한 가운데에도 오히려 분격, 난사를 계속하여 마침내 적들을 대패, 복시수리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로 인하여 호남이 득전하기에 이르렀다'고,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때 왜적의 대장도 공에게 사살되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저들이 지금토록 공을 명장으로서 기억하며, 난복불이 한다고도 말하고 있거니와, 숙종 때 왕명으로 편찬된 <선조보감>에서도 그와 같은 이 전투에서의 공의 무공을 권율 장군의 그것과 함께 극찬하고 있다. 황공은 후일 증의정부좌찬성과 시호 무민을 받는다. 본간이 장수이며, 저 유명한 황희 정승의 5세손으로, 1550년 명종 5년에 오늘날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장신미수에 형모가 기위하고 여력이 절인하며 특히 궁마에 뛰어났던 그는 선조 9년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국경 지역에 파견되어 약 6년 동안 많은 군공을 세웠고, 선조 23년에는 통신상사 황윤길의 군관으로 뽑혀 일본에 다녀온다. '차적이 불구에 필도해 하리니 오장용차 하리라' 하며 보검 2구를 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현전 후 계사 3월에 충청병사가 된 공은 조명을 받은 바도 아니요, 자기의 영역도 아니었으되 혹은 경기도 수원, 안성, 죽산 등지에, 혹은 상주의 적암, 의령의 가력 등지에까지 나아가 적을 물리쳤고, 특히 6월 하순 30만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임박하자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 등 호남 출신 제장과 더불어 성내에 들어가 주장의 일인으로서 전후 9일 간의 혈전을 진두지휘하다 적환에 쓰러진다. 용략이 제장의 으뜸이었으며, 그래서 공이 살아 있는 한 성중이 의중하였고, 공이 쓰러지자 성도 무너졌으니 공의 죽음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성은 지탱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당지인들의 공통된 통한 어린 외침이었음을 역사는 전한다. 전라감사 이정암이 위의 계사 연말 보고에서 공의 진주성에서의 최후를 설명한 후, '오호라! 황진이 죽지 않았던들 진양도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외다. 공의 그 우뚝 솟은 충의애국의 절은 이를 고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외다.' 라고 끝맺은 것도, 또는 효종 3년 황공의 행장을 지은 당시의 우의정 조익이 그 글에서 '진주성 함락 당시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모두 다 황공약재언들 성필불지함의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을 전한 후, '그러나 비록 공은 죽고 성도 무너졌으되 적의 기세 또한 여기에서 크게 꺾이어 결국 그들도 호남 진경의 야욕을 버리게 되었으니 폐차호남 재득보전의 공은 모두 공에게 있도다.'라고 결론한 것도 다 그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공의 그 호남을 지키고 조국 재흥을 가져오게 한 공을 논함에 있어 이현전의 공적을 빠뜨릴 수가 없다. <호남절의록>만 보더라도 앞에서 거명되지 않은 최호, 양응원, 박흥남, 박기수, 노홍, 권래, 이보, 김덕명, 노인 등의 이름이 보인다. 불행히도 진주에는 사우가 모셔지고 정충단비가 세워진 지 이미 수백 년이로되 그 수백 년 동안 이곳 이현에는 표목 하나 없었으며, 비록 그간 구비의 칭송이 있었다고는 하나 세태 풍조의 급변으로 이제 그 구비마저 사라지고 있으니 뒤늦게나마 이 대첩비를 이곳에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끝으로 다년간 이 일을 추진해온 추진회 여러분의 노고가 컸음을 첨기한다. 단기 4332(서기 1999)년 5월 전국사편찬위원회위원 전북대학교명예교수 원광대학교 교수 송준호 근찬(글을 지음) 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문학박사 송하경 근서(글씨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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