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핵폭탄 투하?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나

맥아더의 빛과 그림자 두 번째 이야기... 한국에서 맥아더 비판은 '역린'인가

등록 2016.08.01 14:20수정 2016.08.0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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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맥아더가 신의주 상공에서 크리스마스작전을 구상 중이다(1950. 11. 24.)

맥아더가 신의주 상공에서 크리스마스작전을 구상 중이다(1950. 11. 24.) ⓒ 맥아더기념관

지난 7월 27일 <오마이뉴스>에 내가 쓴 기사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그는 오만방자했다>가 저녁 늦게 출고됐다(해당 기사 보기).

기자로서는 기사가 메인 면에 크게 실리면 좋다. 하지만, 이즈음 나는 '쉰 세대'를 한참 지난 '골동품 세대'인지라 그저 실어만 줘도 감지덕지할 처지다.

그런데 그 기사는 1시간 만에 메인면 탑 기사에 배치됐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시의적절한 가사로 내가 무척 공들여 쓴 걸 알아줬기 때문인 듯하다. '노병은 죽지 않았다'는 맥아더의 퇴임사 한 구절을 연상케 했다.

이 기사는 출고된 이후로 시간당 2000~3000 조회수를 기록했고,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메일함을 열어보고자 네이버를 열었다. 네이버에 실린 내 기사의 조회수는 알 수 없었으나 댓글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는 7월 31일 오후 10시 09분 현재 추천은 926회, 댓글 4289건이 달렸다. 이로 미뤄볼 때 조회수는 아마도 수십만 회에 이를 듯하다. 내 기사의 <오마이뉴스> 조회수는 11만2315, 좋아요는 2658, 추천은 323으로, 2003년 7월 8일 시민기자로 등록한 이후 내가 작성한 1300여 건 기사 중에 최대 조회 기사가 됐다.

그런데 나는 누리꾼들이 쓴 댓글들을 읽으면서 어떤 기쁨보다 자성(自省)과 곡해에 대한 안타까움, 내 기사의 진의를 몰라주는 섭섭함을 느꼈다. 또한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해방과 6·25 전쟁(한국전쟁) 당시 같이 '빨갱이'라는 단어가 수많이 발견됐다. 이 현상을 보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정전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서로 간 원한의 골이 매우 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이버 기사·<오마이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 그리고 쪽지함으로 온 의견 등을 일부 뽑아 정리해봤다.


네이버에 달린 댓글... "와, 진짜 빨갱이가 있네"

a  맥아더기념관 전경

맥아더기념관 전경 ⓒ 박도


sy39**** : 기자가 전라 좌빨인가? 오마이갓… 로동신문인 줄….


kang**** : 와 ~ 이거 누가 쓴 거임? 와 진짜 빨갱이가 있네.

heym**** : 이 기사를 쓴 기자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해서 총살시켜라.

good**** : 기자 새끼 북한간첩이다. 목 잘라 광화문 사거리에 걸어라.

vani**** : 전략적인 큰 틀에서 맥아더가 북진 이후에 경솔했고 핵무기 사용 역시 소련이라는 변수를 고려했을 때 위험한 도박이었다고 보여지긴 하는데…. 이건 표현이 정말 북한기관지 같네. 중공군의 대역전극이라니…거부감 드는 기사다.

a  중국군이 나발을 불며 공격하고 있다. 이 원시적인 나발소리에 유엔군들은 트라우마 현상을 일으키며 공포에 휩싸인 채 전의를 잃었다고 문헌은 전하고 있다.

중국군이 나발을 불며 공격하고 있다. 이 원시적인 나발소리에 유엔군들은 트라우마 현상을 일으키며 공포에 휩싸인 채 전의를 잃었다고 문헌은 전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wkdw**** : 사진들이 너무 끔찍해서 할 말을 잃었어요? 전쟁이 애들 장난입니까? 군대는 갔다 오셨는지?

heek**** : 오마이뉴스 클라스...

psjk**** : 미국 맥아더 빠는 놈들아! 애치슨선언 검색하고 와라. ㅋㅋ 난 북한 편드는 게 아니라 ㅋㅋ 북한이 오판하고 쳐들어오게 만든 사실과 북한 땅도 모두 차지할 수 있는 전세였는데 공산 진영과 야합으로 반 띵한 거 자체에 대해 화가 나고 아쉬운 건데 왜 빨갱이소리 들어야 함?

ts88**** : 미국이 소련의 남하정책이 분명함에도 그리고 당시 최소한의 정보력으로도 북의 소련제 대대적 무장을 알면서도 남한에서 일본으로 철수하였는데 아마도 남침을 방조하고 당시 소련의 남하를 유도해 소련의 공산주의 확대정책에 철퇴를 가하겠다는 심사였는지도….

rudr**** : 사실 이 기사의 논지가 맞지. ㅋㅋ 무조건 오마이뉴스라고 까고 보네. 맥아더 뛰어난 지휘관인건 맞지만 전쟁광인 것도 맞음. 실제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맥아더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3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거라 얘기함. 그래서 트루먼이 해임한 거고 ….

a  유엔군들이 후퇴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고 있다(1950. 12.)

유엔군들이 후퇴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고 있다(1950. 12.) ⓒ NARA


<오마이뉴스>에 달린 댓글... "그들은 또다른 침략자"

a  맥아더기념관에 걸려있는 맥아더 사진 액자

맥아더기념관에 걸려있는 맥아더 사진 액자 ⓒ 박도

클라우드(mandella) :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맥아더가 자기 나라 땅에서라면 함부로 원자탄 투하를 입에 담았겠나.

미군은 애초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한국인들의 생명과 안전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환영 나온 인파를 향해 미군은 번잡하다는 이유로 총질을 해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해방의 기쁨을 안고, 거리에 나온 그 순박한 사람들을 향해 총질을 했다는 것은 일본의 빈자리를 메운 또 다른 침략자요, 점령군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 어떤 양코배기 놈도 한반도와 한국 민족에 대해 아는 놈도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다.

주관적으로 볼 때(ssm8220) : 박도? 이 빨갱이 자식을 아작을 내버려야 하는데….

Jay Shim : 뭐, 크게 놀랄 일도 아님. 적을 깔보다 중국에 당하고 베트남에 당하고. 현지인들만 죽어 나가는 거지.

明玧智(mmimmi) : 이 글을 쓴 박도라는 자는 군필인가? 전쟁 중에는 적군을 잔인하게 처형할 수 있다.

다음에 달린 댓글과 쪽지함으로 온 의견

뚜비 : 박도씨! 당신 군대 갔다 왔어요? 군대 안 갔죠?
한비* : 맥아더의 만주 원폭시 소련이 원자탄을 한국에 쏠 것으로 판단한 근거가 뭔가요? 기사 서두는 그럭저럭 팩트 파인딩을 했지만 후반 이후는 개인의 짐작과 예단을 담은 선전 글을 쓴 것 같습니다. 맥아더를 이렇게 폄훼하는 저의가 뭡니까?

누리꾼 질문에 대한 답변

나는 누리꾼들의 쏟아지는 비판과 질문에 긴장하면서 한동안 고민했다. 사실 하나의 글이나 기사는 내 손을 떠나면 그 다음 해석이나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 댓글을 단 수천 명의 누리꾼들은 때로는 글을 쓴 기자에게 분개하면서, 또 일부는 공감하면서 추천을 누르거나 좋은 기사 원고료 주기로 성원해주고 있다.

사실 나는 11년 전 누리꾼들이 열화와 같은 성금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도 갔고, 또 맥아더기념관도 가지 않았던가?

몇몇 누리꾼들은 내 신상도 털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고, 또 어떤 누리꾼들은 청문회에 세우겠다는 댓글도 달았다. 나는 누리꾼들의 압력 이전에 뉴스 생산자로, 소비자에게 그분들의 질문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대답할 수는 없지만 요약해 답하고자 한다.

① 기자가 전라도 사람인가?

"나는 1945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서 구미초등학교와 구미중학교를 졸업한 토박이 구미사람이다."

a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CAP 소대장 시절의 기자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CAP 소대장 시절의 기자 ⓒ 박도

② 당신 군대 갔다 왔어요? 군대 안 갔죠?

"나는 대학 재학 중에 102 학훈단에 입단, 졸업 후 곧장 육군소위로 임관해 광주보병학교에서 16주 기초군사교육을 마치고 전방 26사단 73연대 1대대 3중대 2소대장으로 명받았다.

그때 선친은 나에게 네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부대 쌀 팔아먹지 말라. 둘째 네 부하를 두들겨 패지 말라. 셋째 네 부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 넷째 전투 수당 몇 푼 더 받을려고 월남전에 지원하지 말라.

나는 2년간 소총소대장 및 대대 직할소대장(CAP)으로 복무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며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1971년 6월 30일 전역식 그날까지 나는 바보처럼 부대근무를 하고 더플백을 메고 사단 전역식에 참석하고자 소대를 떠나는데 그때 대대장이 지프차를 몰고 와 사단까지 태워주면서 나를 설득했다.

'박 중위, 지금도 늦지 않아. 장기복무하게.'
'아닙니다. 저는 제대 후 학교 선생님이 될 겁니다.'
'지금 우리 군에는 자네와 같은 인재가 필요해.'

사단 전역식장에서 만난 연대장도 식이 시작하기 전에  내 더플백을 자기 차에 싣자면서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ROTC 출신이었지만 육사 출신보다 더 원리원칙을 지킨다는 말을 귀에 익도록 들었다. 하지만 이상한 말로 북의 내 동족을 헐뜯은 적은 그때도 이후 오늘까지도 단 한 번도 없었다."

a  북한군 부역 혐의자들이 산골짜기로 끌려가고 있다(1951. 5. 경북 대구 부근)

북한군 부역 혐의자들이 산골짜기로 끌려가고 있다(1951. 5. 경북 대구 부근) ⓒ NARA


'빨갱이' 이란 말...

③ 박도? 이 빨갱이 자식을 아작을 내야 하는데….

"'빨갱이' 이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해방공간과 6.25 전쟁(한국전쟁) 중 이 한 말로 숱한 사람이 죽어갔다. 누군가 손가락 총으로 "저놈 '빨갱이' 다"라고 하면 경찰이나 군인들은 곧 골(짜기)로 데려가 죽였다. 부대 쌀을 팔아먹지 않았다고, 부하들을 두들겨 패지 않았다고, 내 동족을 이상한 말로 욕하지 않는다고 나를 '빨갱이'로 매도한다면, 더 이상 이 땅에 이런 말이 사라지도록 순절할 용의가 있다."

④ 왜 맥아더를 '오만방자하다'고 평가했나?

"대학 재학 시절 정한숙 교수는 "너희들 가운데 한국전쟁을 소설로 써보라"고 채찍질하셨다. 그래서 나는 늘 그 말을 염두에 두고 한국전쟁에 관해 공부했다. 마침 2004년 <오마이뉴스> 누리꾼의 도움으로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갔는데 영어에 서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전쟁 사진을 리서치하는 일이었다.

그 후 두 번 더 내 개인돈으로 미국에 가서 한국전쟁 사진 약 2000여 컷을 리서치해 오고, 관련 문헌을 들추면서 전쟁사를 공부했다. 대부분의 미국 기자나 저술가들은 맥아더를 오만방자하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번 기사를 쓸 때 나는 미국인 저술가 조셉 커민스(Joseph Cummins)가 쓴 <라이벌의 역사>를 참고하여 썼는데 그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에서의 회합은 맥아더와 트루먼이 마주 본 단 한번의 만남이었다. … 맥아더는 트루먼보다 웨이크에 먼저 도착했으나 트루먼의 비행기 문이 열리고, 대통령이 활주로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를 공손히 대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장군은 트루먼에게 인사는 하지 않고 단순히 손을 내밀어 악수만 청했다.' - <라이벌의 역사>(말글빛냄, 69쪽)

직속상관인 트루먼 대통령에게까지 오만하게 대한 맥아더의 언행은 두고두고 기자들에게 화제가 됐다. 그래서 맥아더에게 오만방자했다는 코멘트가 각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a  한국전쟁 때 맹위를 떨친 소련제 탱크

한국전쟁 때 맹위를 떨친 소련제 탱크 ⓒ NARA


한국전쟁은 남침이었다

⑤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장편소설에 언급했다."

'1949년과 이듬해인 1950년에 북한 김일성은 소련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해방전쟁'을 일으키겠다며 이를 승인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1차 방문 때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 첫째는 북한 인민군이 남한 국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치 못하다는 점이요, 그 둘째는 남한에 미군이 남아 있단 점이요, 그 셋째는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아직 유효하다는 이유를 들어 때를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이에 김일성은 소련의 지속적인 원조를 묵묵히 받으며 착실히 군비를 증강하는 가운데 1949년 6월 29일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했다.

마침내 이제야 말로 조국통일전쟁의 호기를 맞았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50년 3월에 다시 모스크바로 갔다. 이에 스탈린은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김일성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며 이 조건이 충족되면 승인하겠다고 했다. 그 하나는 미국이 개입치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과 그 둘은 중국의 승인이었다. 소련에서 돌아온 김일성은 곧이어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의도를 전달하였다. 이에 마오쩌둥은 스탈린 의도에 대해 직접 확인을 요청하자, 스탈린은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이를 확인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케 되었다. 더욱이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한 뒤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여 공산 측을 오판케 했다.

이 '애치슨 라인'은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것으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은 알류산열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필리핀열도를 연결하는 선으로, 한국과 대만은 이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때를 호기로 삼은 김일성은 모스크바, 베이징을 오가며 그들에게 비밀리에 군사원조를 받으면서 전쟁 준비를 매우 치밀하게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한의 수뇌부는 그런 사실도 제대로 파악지 못한 채, 군사력도 북한에 훨씬 뒤지면서도 상대를 아주 깔보고 계속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북진통일 망언을 외쳐대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했다.' - <약속>(박도, 눈빛출판사, 42~43쪽)

⑥ 맥아더의 원자탄 투하에 대한 기자의 견해는?

"한국전쟁을 단박에 끝내려는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이 중국군 참전으로 참패하자 맥아더는 합동참모부에 원자폭탄 투하 지점을 무려 26곳이나 선정,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투하 승인을 요청했다. 합동참모부는 긴급회의 끝에 맥아더의 승인을 거부했다. 핵무기의 피해는 적군뿐 아니라 아군에게도 그 피해를 주는 데다가 핵무기 사용 뒤 소련의 대응이 매우 두려워했다.

또 하나 문제는 핵무기는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하기에 이는 인류 공동의 적으로 투하 이후 미국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전세계가 반대했던 맥아더의 만주 원자폭탄 투하를 유독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의 극우 세력들이 지금까지도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핵무기는 인류 공동의 적이다. 아직도 '북폭'을 지껄이거나 주장하는 '꼴통'들은 정말 대책 없는 인류의 적이요, 지구 환경 파괴자다."

a  토벌대들이 공비들의 목을 잘라 콜타르에 담근 뒤 상자에 담아 상부로 보내고 있다.

토벌대들이 공비들의 목을 잘라 콜타르에 담근 뒤 상자에 담아 상부로 보내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⑦ 기사에 실은 학살 사진이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나? 그리고 이 사진의 정확한 출처는?

"잔인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은 건 진실성 훼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국문과 출신이기에 영어가 매우 서툴다. 제1차 방문 때 안내자 고 이도영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주한 미 정보부의 한 무관이 좌익사범 처형현장을 직접 촬영해 도쿄 맥아더 사령부로 보낸 것이라고 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나선 왜군장수들이 본국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인 사상자 보고를 처음에는 머리를 잘라 보내다가 나중에는 귀를 잘라 보낸 것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지금도 일본 교토에 가면 귀무덤이 있다. 이런 면에서도 역사는 돌고 도는 것으로, 역사를 소홀히 하는 백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 당하기 마련이다."

더 이상 내 신상이나 내 기사가 보고 싶다면, '박도글방'이나 <오마이뉴스>에서 '박도 기자'를 검색하면 된다. 내가 길렀던 고양이 이름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손자가 말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것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이 말을 오늘의 남과 북 지도자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다.

a  기자에게 맥아더기념관을 안내해 주고 당신의 차로 데려다준 재미동포 고 이도영 박사. 그는 제주 출신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한을 생전에 다 풀지 못하고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도영 님! 이제는 부디 편히 눈감으십시오."

기자에게 맥아더기념관을 안내해 주고 당신의 차로 데려다준 재미동포 고 이도영 박사. 그는 제주 출신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한을 생전에 다 풀지 못하고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도영 님! 이제는 부디 편히 눈감으십시오." ⓒ 이도영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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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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