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때문에 지진이..." 조선 때도 그랬다

1518년 기록적인 한양 강진... 지진이 보수-개혁파 정쟁 계기 되기도

등록 2016.09.20 11:44수정 2016.09.2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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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경주 강진에 이어 일주일 만인 어제(19일) 저녁, 규모 4.5의 여진이 또다시 발생해 전국민을 불안케 만들었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는 말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양을 포함해서 전국을 놀라게 할 만한 강진 때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 고구려·백제에서 발생한 지진이 정치 변동으로 이어진 사례는 별로 없는 데 반해, 신라 쪽에서 발생한 지진이 정치 변동으로 연결된 사례는 많았다. 서기 100년 파사왕 때처럼 경주 강진을 계기로 한 정치적 혼란 때문에 신라가 일시적으로 가야의 속국이 된 사례도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은 아니라도, 국가적인 종교 행사를 열어 민심을 잠재운 경우도 있었다. 혜공왕 때인 779년에는 경주 강진으로 100여 명이 사망하자 왕이 직접 법회를 열어 민심을 달래기도 했다. 

그에 비해 고구려·백제의 지진은 그 정도 파장까지 낳지는 않았다. 한양은 백제의 초기 도읍이 있었던 곳과 인접해 있다. 그래서 지진 피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이 때문에 한양 사람들은 지진에 대해 상대적으로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한양의 강진, 엄청난 일이... 위패가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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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광화문. ⓒ 김종성


그랬던 한양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확산시키는 사건이 조선 중종 때인 1518년에 터졌다. '강진'이라 표현할 만한 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지진이 발생한 날은 음력으로 중종 13년 5월 14일(양력 1518년 6월 21일) 저녁부터 16일까지 3일간이었다.

이 지진은 한양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발생했다. 원래부터 지진이 많이 나는 경상도뿐 아니라 저 멀리 평안·함경도까지 지진 피해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서 한양의 지진 피해도 적지 않았기에, 임금과 조정 관료들의 일차적 관심 대상은 한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양의 피해 규모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경험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레처럼 '꽝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발생한 강진으로 인해 한양 곳곳의 건물 담장은 물론이고 성벽 일부까지 무너졌다. 이 때문에 한양 곳곳은 놀라 대피하는 사람과 말들로 인해 일대 혼잡을 이뤘다. 이때 지진은 지난 9월 12일 서울에서 느낀 지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것이었다.

당황한 정부는 한양에 오래 거주한 노령자들에게 "이런 지진을 겪어 본 적이 있으시냐?"고 물어봤다. 중종 13년 5월 15일의 <중종실록>에 따르면, 한양의 노령자들은 한결같이 "이런 일은 옛날에는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이 정도로 당시의 한양 강진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백성들이 입은 피해가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만, 이때 사람들한테는 그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한 피해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상징물인 종묘의 위패(신주)가 지진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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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 김종성


옛날 사람들은 무덤보다 사당을 더 중시했다. 거기다가 왕실의 사당은, 죽어서 신이 된 전직 임금 부부를 모시는 곳이었다. 죽은 뒤에 조선을 수호하는 신들을 거기에 모셨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는 이곳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성했다. 그런 종묘의 위패가 지진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건물 담장이 흔들리고 한양 성벽이 파손될 정도였으니, 종묘 위패가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중종 13년 5월 17일 자 <중종실록>에서는 위패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기술하지 않았다. 종묘 내부의 난간과 담장이 무너졌다고 한 뒤 "위패가 놀랐다"라고만 했을 뿐이다. 실록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신어(神馭)가 놀랐다"이다. 신어는 위패의 다른 말이다.

위패가 놀랐다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은, 성스러운 위패가 넘어지거나 떨어지거나 파손됐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종묘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사실적으로 기록할 수 있어도, 종묘 위패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왕후나 임금의 위패가 놀랐는지는 몰라도,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한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난 2008년 2월 서울 남대문이 불탔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받은 충격보다 분명히 더 큰 충격이었다. 

지진 전후, 조정 신경전 막전막후

왕조의 상징물이 흔들리는 이 사건은 정치권에도 당연히 영향을 줬다. 당시 불완전하게나마 정국 주도권을 잡고 있던 개혁파 조광조와 조광조를 질시하고 혐오하는 보수파 양쪽에 영향이 있었다. 양쪽은 똑같이 지진 정국을 활용해 정국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하거나 그것을 탈환하고자 했다. 결국 이 사건은 개혁파와 보수파의 불완전한 연립내각 형성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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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 위키피디아백과사전

당시 정계의 양대 세력은 사림파라 불리는 개혁파와 훈구파라 불리는 보수파였다. 임금인 중종은 개혁파를 전략적으로 지지했다. 마음으로부터 지지한 것은 아니고, 너무 비대해진 보수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1516년부터 정암 조광조와 개혁파를 밀어줬던 것이다.

개혁파는 임금의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아직은 세력이 미약했다. 그래서 삼정승이 이끄는 의정부와 육조판서가 이끄는 실무 행정관청까지는 장악하지 못했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처럼 국정운영을 비판하는 기구들만 장악했을 뿐이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조광조 진영은 의회는 장악했지만 행정부는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삼정승 중에서 우의정 자리가 비게 됐다. 그러자 중종과 개혁파는 이 자리를 개혁파와 가까운 인물로 채우려 하고, 보수파는 자기 쪽 사람들로 채우려 했다. 개혁파는 안당을 지지하고, 보수파는 남곤·김전·이계맹을 밀었다.

그런데 안당한테는 약점이 있었다. 젊은 개혁파 선비들의 지지를 받은 그는 부드럽고 합리적이었지만, 부하들에 대한 통솔력이 약했다. 그래서 보수파 입장에서는, 이 점만 집중 공략해도 안당을 낙마시킬 수 있었다. 굳이 정치 성향을 따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보수파가 안당을 싫어하고 안당한테 약점도 있었지만, 중종과 개혁파는 어떻게든 안당을 우의정으로 만들려고 했고, 보수파는 임금의 체면을 봐서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불만의 기색을 표출하면서 신경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이 한양 강진이 발생하기 직전 상황이다.

이런 정국의 혼란을 단번에 정리한 것이 음력 5월 14일의 한양 강진이었다. 지진으로 종묘 위패까지 '놀라는' 대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조선 전체가 동요하는 틈을 타서 중종이 선제적 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지진 다음 날인 음력 5월 15일, 안당을 우의정에 임명해버린 것이다.

뒤이어 다음 날인 16일에는 보수파인 심정이 형조판서에 임명됐다. 개혁파 쪽 사람이 삼정승에 진입하고 연립내각이 형성되는 속에서, 보수파 관료가 요직에 들어가는 일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지진의 원인이 개인에 있다고?

종묘 위패가 흔들리는 중대한 상황에서도 중종이 정치 공세를 강화하자, 이에 대응해 혹은 호응해서 보수파와 개혁파도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 보수파는 지진의 원인을 조광조한테 돌리고 개혁파는 그 원인을 보수파한테 돌리면서 열띤 정쟁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보수파 중진인 조계상은 중종 앞에서 조광조를 소인배로 몰면서 '조광조에게 천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조광조 역시 직접적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보수파를 비판했다. 지진 발생 2일 차인 음력 5월 15일 경기도 용인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에 보수파를 비판했던 것이다. 

문집인 <정암집>에 따르면, 조광조는 지진을 감지한 직후에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심정이 형판이 되겠구만"이라고 중얼거렸다. 지진이란 불길한 사건을 접하자, 심정 같은 보수파 인물이 잘 되려나 보다 하는 느낌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직후에 실제로 심정이 형조판서에 임명됐다.

요즘 같으면 지진 발생 직후에 정계에서 "누구 때문에 지진이 났다"느니 "누구는 소인배다"느니 하는 말다툼이 나면, 정치권 전체가 욕을 먹을 것이다. 당시 민간에서 이런 반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이 논란은 개혁파의 승리로 끝났다. 조광조를 비판한 조계상이 파면을 당함으로써 개혁파가 논쟁의 승자가 됐던 것이다. 결국 보수파 때문에 땅이 갈라진 것으로 결론이 난 셈이다.

지진 안전지대인 한양을 강타한 1518년의 강진은 그렇게 개혁파가 삼정승 중 하나를 차지함으로써 연립내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남긴 채 역사 속의 사건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정국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한양에서도 강진이 발생했으니, 당시 한양 사람들은 '한양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구나'라는 식의 말들을 했을 것이다.
#지진 #경주 강진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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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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