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지난 첫 일요일 오후에 휴우가 여자아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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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살면서 스스로 존재 이유조차 물어본 적 없다고 철학이 없는 것 아니고, 의미 없는 삶 또한 아니다. 저마다 털어놓으면 한 꾸러미 넘칠 이야기보따리를 안고 사는 게 인생인데 그 이야기에 귀담아듣는 이가 없을 뿐이다.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민들을 만나다 보면,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도 세상살이가 어찌 이리 기구할까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베트남에서 온 '휴우(가명)'가 그런 경우다.
추석 연휴가 지난 첫 일요일 오후에 휴우가 여자아이를 낳았다. 첫째는 자연분만이었는데, 이번에는 제왕절개로 낳았다. 배가 불러올 즈음 유산 위험이 있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몇 번 들었던 휴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 측에서 하자는 대로 따랐고,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휴우는 갓 스물을 넘겼던 8년 전 베트남에서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한국에 온 지 일 년 만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휴우는 출산했을 때 요리사인 남편이 죽이라도 끓여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평소 말수가 적었던 남편은 애정 표현도 서툰 마마보이였다. 모든 것을 시어머니 의견대로만 하는 남편은 아이가 자다가 깨도, 아파서 울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심 섭섭했지만 휴우는 그러려니 했다.
반면 시어머니는 툭하면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아이에게 오물오물 입에 넣고 있던 것을 뱉어 먹이는 등의 문제로 휴우와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잦아졌다. 시어머니는 휴우가 장을 볼 때마다 돈을 많이 쓴다고 구박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댁 식구들 모두 휴우를 만만하게 보았는지, 어느 날인가는 시동생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주먹질을 한 것은 아니지만, 팔뚝을 꽉 움켜쥐고 당기는 바람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근육통을 느낄 정도였다. 그 일로 휴우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몇 곳을 전전하다 출산 전 한국어 공부를 하러 다녔던 이주노동자쉼터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휴우는 집을 나오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밖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시동생에게 사과받길 원했고, 남편이 자신을 찾아와 주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휴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와 카드를 막아버렸다. 게다가 얼마 후, 아이는 할머니가 키울 거라면서 이혼청구 소송 사실을 전해왔다.
휴우는 아이를 직접 키우기 원했다. 이혼청구 소송 사실을 알았을 때 아이를 뺏길까 봐 두려웠던 휴우는 베트남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서 재판을 받기로 하고 돌아왔다. 그 뒤로 일 년 넘게 진행된 재판 결과 양육권은 아이 아빠에게 돌아갔다. 휴우에게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한 달에 세 번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데 만족해야 했다.
일요일마다 아이를 만날 때면 휴우는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는 늘 감기를 달고 살았고, 콧물을 흘리며 목이 부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가 치료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아이와 만날 때마다 병원과 약국에 가는 일은 예사가 돼 버렸다. 약값과 교통비, 아이를 만날 때마다 들어가는 돈은 만만치 않았고 파김치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아이를 만나고 나면 마음만은 가벼웠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어 해가 지날 때쯤 휴우에게 결혼하자며 집적거리는 남자가 생겼다.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직장 동료였다. 그 일로 회사를 그만두자, 회사에서는 남자를 그만두게 했다면서 재입사를 권했다. 한동안 다른 직장을 찾지 못했던 휴우는 재입사를 택했다. 그간 사정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은 휴우가 꼬리쳐서 남자 인생 망쳤다며 눈을 흘겼다.
아이 때문에라도 재혼할 생각이 없던 휴우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서 다시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했다. 이때 회사에서 다시 불렀는지 남자가 간청했는지 남자도 재입사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덜해졌고, 휴우는 심신이 지쳐가기 시작했다. 반면, 남자는 집요했다. 심지어 자취방 앞까지 찾아오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친구 하나 없는 타국, 유난히 쓸쓸한 휴우씨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