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하려면 '팜므파탈' 혹은 '무성적 존재' 되어라?

모든 문제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태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등록 2016.11.21 15:58수정 2016.11.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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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트위터 프로필은 '혼밥러'다. 문자중독자이고 그때그때 꽂히는 건덕지는 많지만 그마저 수시로 지나갈 뿐, 잡덕(이것저것 오타쿠)마저 되지 못해 별다른 취향을 나열할 수도 없고, 내가 하는 일을 단순하게 설명할 재간도 없어서 '걍' 혼밥러가 됐다.

요즈음의 관심사가 진공상태인 이유는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고이 접어 넣게 만드는 '이 시국' 때문이고, 나도 반쯤은 몸담고 있는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으로 혼이 비정상에 가까워져서다. 인터뷰 작가 및 잡글러이며 여성영화와 내러티브에 관심이 있어 영화에도 어중간하게 발을 걸치고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는 못한 프리랜서다.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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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신체는 종종, 협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회자되곤 한다. ⓒ pixabay


"다 주고 나한테만 안 주면 기분 더럽죠."

일전에 영화 관련한 케이블 비슷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난 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 딱히 나를 향한 말은 아닌 듯했지만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졌고, 그 말에 아무런 말도 얹지 못했다. 그는 내세울 만한 경력은 없지만 저예산 영화의 주연을 따낸 신인배우(여성)에게 그 비결(?)이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십수 년 간 연기를 해왔지만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피해의식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여성의 신체는 종종, 협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회자되곤 한다. 실제로는 매 순간 평가당하고,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아무런 직업상의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약자의 위치가 순식간에 엄청난 잠재 자원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휘둘러 좋은 배역을 따내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고 의심되는 여성에게는 소위 '걸레'라는 멸칭이 따라붙는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여배우'가 응당 지녀야 할 '미모와 젊음'이 전제되며 '여성은 꽃'이라는 철 지난 명제도 덕지덕지 붙어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모를 이 '빻은' 사고방식이야말로 여혐의 총체와 같다. 예쁘고 어린 여성에게 세상은 이리저리 저울질하고 갖고 놀 수 있는 놀이터와 다름없으며 필사적으로 권력자의 사다리에 올라가 이들을 취하고야 말겠다는 결의야말로 이 판의 남성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일일이 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점점 무뎌지게 마련이다.


트위터에서 본 '영화계 성폭력' 해시태그의 한 사례가 떠오른다. 한 영화과 교수가 영화 현장에서의 성적 괴롭힘과 폭력적 위계를 호소하는 제자(스태프)에게 고심 끝에 내놓은 답이 "팜므파탈이 되어 저들을 이용하거나 남자처럼 꾸며 무성적인 존재가 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현실을 바꿀 의지가 없는 자가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답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현실은 공정한가? 도리가 없으니 그저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한가? 교수의 답을 따른다 해도 팜므파탈에게는 헤픈 여자니 언제든 취할 수 있다는 폭력적인 언행이, '남자나 흉내 내는' 무성적인 여성에게는 또 다른 멸시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결국 바꾸기 싫은 것과 다름없다- 받아들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남성이라는 기득권자의 것 아닌가.

이런 생각과 행동의 이면에는 "남성의 성욕은 당연한 것"이며 성적인 침해를 초래하고 유발하는 것은 오로지 "여성의 행실"이라는 사고가 숨어있다.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사건들을 제기하며 이를 방관하고 잘못된 전제에 바탕해 행동하는 남성들을 문제 삼으면, "난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는 항변이 돌아오고는 한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공감하는 능력'일진대, 동성애 관련 뉴스에 꼭 달리는 혐오와 공포에 질린 댓글들을 보면 성적인 폭력에 노출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사람의 얼굴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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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의 한 페이지 다소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재현된 '악어'의 이미지는 모든 남성이 가해자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을 한 피해여성에게 이입할 수 있도록 한 장치다. ⓒ 악어프로젝트


<악어 프로젝트>(토마 마티외 지음, 푸른지식 펴냄)라는 만화는 길거리 성폭력을 중심으로 저자의 주변 증언을 토대로 한 실화를 담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성기를 노출하거나, 대중교통에서 몸을 만지거나 이를 제지하면 모욕적인 언사로 괴롭히는 일, 새벽에 귀가하는 여성을 뒤쫓아서 밤새도록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남성, 우연히 마주친 헤어진 남자친구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모욕적인 언사를 해도 여성의 잘못인 양 책임을 돌리는 이들이 모두 악어의 외양을 하고 있다.

여성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등장하지만, 남자들은 모두 악어의 얼굴로 나온다. 남성이 모두 범죄자라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인간의 얼굴을 한' 여성의 편에 서는 것을 의도한 표현이다. 한 번쯤 피해자의 입장에 서 본다면 더는 가해자에게 이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바람이 드러나 있다.

다시 밥 얘기로 돌아가서, 거의 혼자서 이따금 찾았던 동네식당 얘기를 해야겠다. 비싸지 않지만 저렴하지도 않은 값에 먹을 만한 끼니를 제공하는 평범한 밥집이었다. 3년 전 가을, 그곳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한 여성시인이 약물을 이용한 추행을 당했다. 옷이 반쯤 벗겨진 채로 약물에 취해 정신을 잃은 그분을 두고, 가해자인 식당 주인(이자 시인)은 자리를 떴고 피해자는 약 열 시간 동안 찬 바닥에 방치되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고, 비슷한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들의 존재에 힘입어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그나마 처벌 가능성이 높아서 안도하게 되는 이 사건은, 강간 약물이 버젓이 한켠에 자리하고 있을 그 식당에서 밥을 먹은 내게 큰 공포와 욕지기가 치밀게 했다.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경험이 없는 여성을 찾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세상, 여성들은 도촬과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시선과 언어적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나 또한 첫 직장에서 거래처와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난 성희롱에 문제제기하며 사직서를 내고 인권위에 진정한 경험이 있다(그 외에도 적으려면 손이 아프다). 이런 일상을 사는 것이 결코 쉬울 리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방관자로서의 팔짱을 풀고, 주변의 여성들을 어떤 보상인 양 바라는 태도를 내려 놓아달라.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쉽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도구나 성적인 분방함을 라벨링 하는 지표가 아니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가 되어줄 것이다. 자신을 옥죄는 남성성의 감옥에서 걸어 나온 이들과 함께, 성범죄자가 만들지 않은 음식과 문학, 창작물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까.
#성폭력 #문화예술계 #페미니즘 #성희롱 #악어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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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하셨습니까>를 썼고 인권, 여성 분야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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