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일당 전원 구속 촉구하며 촛불 밝히는 시민들19일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광화문에서, 전국으로!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 전국동시다발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유성호
집회나 시위에 덧씌워지는 평화나 폭력 따위의 사고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정치과학적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국가와 정부, 그리고 지배 계급은 자신들 안위를 위해, 또 권력이 자신들의 손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의 '재조화(Re-Synchronization)'를 통해 혁명에 대한 요구를 흡수하고 수동화시키고 무마시키려 해 왔는데,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런 개념을 두고 '수동적 혁명(Passive Revolution)'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존의 폭력 시위와는 다르다는 뉘앙스를 가진) '평화 시위' 프레임 또한 그런 재조화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그 프레임이 시쳇말로 잘 먹혀 들어간 게 이화여대 본관 점거 시위,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코너에 몰리며 그 과정에서 100만 촛불집회를 위시하고 일어난 최근의 집회들일 것이다. 둘 다 "우리는 (기존의 폭력시위와는 다른) 평화시위를 한다"라고 주장했고 스스로의 행위를 '평화'라고 프레이밍했다.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경찰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최근 촛불집회의 경우에도 모두 귀한 시간을 내어 그 곳에서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높은 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물대포와 최루액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평화시위를 해야만 한다는 근거는 되지 않을 것이다. 각자 생각하는 집회와 시위의 상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시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차벽 뒤에 있는 권력자들의 평화를 깨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항폭력'으로서의 시위집회나 시위가 가지는 성질인 폭력은 위(국가/정부)에서 아래로 흐르는 폭력에 대항(Counter)하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의 성격을 지닌다. 국가폭력(State-Violence) 등 체제나 국가, 혹은 주도권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단적인 예시로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의 투사들이나 2015년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끝내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은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대항폭력의 사용자였고, 결국 국가폭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경우다.
이 '대항폭력'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선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시위를 폭력과 평화라는 두 극단적 프레임으로만 사고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들과 연관 지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집회에서의 우리는 촛불을 들건 밧줄을 들건 모두 폭넓은 의미에서 대항폭력의 사용자이다. 다만 자신이 참여하고 행동하는 층위가 매우매우 다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폭력 프레임에 갇혀 "폭력은 무조건 나쁘고 평화는 무조건 옳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스스로 낙인을 찍고 다른 이들('평화 시위' 프레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시위'와 '평화시위'를 나누고 "평화 시위가 (무조건) 옳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애초에 성립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 변화의 열망을 흡수시키고 수동적인 수준으로 머물게 하는 재조화 헤게모니에 스스로 종속되어버리는 것임은 물론이고 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평화시위'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재조화 담론을 깨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박근혜 정부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자신의 임기를 여차저차 잘 마치게 되는 것으로 돌아올 것이다.
또 앞으로의 국가·정부 지도자들이 '그래도 되니까'라며 이 따위의(혹은 더 심한) 부패를 저지르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지금같은 사회적 데카당스(decadence, 사회적 타락)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국가와 지배 세력이 국민과 국민의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더욱 더 설 자리를 잃어 갈 것이고, 우리는 '평화시위' 라는 코르셋이 우리를 점점 더 조여오는 것을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단적인 예로 125만이 모인 11월 12일 촛불집회에서는 비폭력과 평화를 이야기한다며 심지어 국가 기관인 법원이 허락한 행진 경로를 불법적으로, 심지어 불법적 수단인 차벽을 이용해 막아서는 경찰에게 비키라는 말 몇 번으로 대응했다. 나는 그것을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그 프레임이 말려버려 스스로의 주장에게, 그리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에 큰 제약을 끼쳐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11월 19일 범국민대회가 끝난 후엔 경찰버스에 붙은 스티커들을 "평화시위"와 "의경들 피곤할까 봐"라는 미명 하에 떼는 행위를 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는 유감스럽게도 타인의 주장을 훼손하는, 마치 벽에 붙은 대자보를 떼어버리는 것과 같은, 폭력적인 행위였고 평화와는 오히려 거리가 한참 먼 행동이었다.
의경들이 피곤한 것이 보기 안타까웠다면 스티커를 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으로, 왜 의경들이 쉬지 못하고 이 곳에 나와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했어야 한다. 의경들은 행진을 막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 때문에 차벽을 치고 무거운 헬멧과 보호구를 착용한 채 거기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르셋을 벗어버리고 더 많은 고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