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 농단 개입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굳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이날 김 전 비서실장은 외부 일정 없이 자택에 머문 것으로 확인됐다.
연합뉴스
[기사 수정 : 30일 오전 10시 50분]"어느 매체의 누구라고 하셨죠?"
그는 역시 노회했다.
2001년 12월 8일, 한국헌법학회가 주최한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한태연 전 서울법대 교수가 유신 헌법 제정 과정과 이 과정에서 김기춘이 한 역할("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에 대해 상세하게 증언했다.
당시 헌법학회장으로서 이 행사를 주최한 안경환 교수는 "유신헌법 제정 당시 기록이나 관련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 전 교수의 증언은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의 말대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유신 헌법 제정 과정이 처음으로 자세하게 확인된 것이었다.
이 증언에 대한 당사자의 반론을 들어야 했다. 핸드폰 번호를 몰라 국회의원 수첩에 나온 자택으로 전화를 했고, 뜻밖에도 그가 직접 받았다. 휴일에 집으로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였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거꾸로 내 신상을 물어보면서 여유를 찾은 뒤, 미리 준비한 듯 반박했다. 한 전 교수의 기억에 착오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 3학년 때인 1960년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수사를 거쳐 유신 전성기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뒤 검찰총장과 법무장관까지 이미 섭렵한, 재선 의원이었던 그로서는 그다지 놀라운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김기춘의 반박과 달리, 1972년 유신 헌법 제정 때 그가 (법무부) 과장이었다는 부분만 빼면, 한 전 교수의 주장은 대부분 당시 상황과 부합한다. 그는 유신헌법 공표 다음 해인 1973년 4월 초에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부장검사급)으로 승진한다. 주 승진자들이 사시 8회였던 데 비해 그는 무려 4기수나 아래인 12회였다. 이 때문에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는 해설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일대 위기 '초원복집 사건'... 헌재 위헌 신청으로 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