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에 숨은 사실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38]

등록 2016.12.15 22:41수정 2016.12.15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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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사건

창의문 바로 아래.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순경의 순직비가 설치돼 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32명의 북한 무장병(124군 부대)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순경은 그 와중에 사망했다. 북한의 무장병이 그 해 한겨울인 1월 18일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능선을 타고 3일 만에 청와대까지 뚫고 내려온 엄청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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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총격전으로 숨진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우)과 정종수 순경의 추모비(좌), 매년 1월 21일 이들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있어 조화가 놓여 있다. ⓒ 유영호


이들 무장병들이처음 발견돼 신고된 건 남파한 첫날인 1월 18일 파주 법원읍 삼봉산이었다. 하지만 국군과 경찰은 이들의 동선을 추적하지 못했다. 완전 군장을 한 채 야간 산악행군을 할 경우 행군 속도가 시간당 4km를 넘을 수 없다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들 124군 부대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로 시간당 평균 10km씩 주파하면서 법원리 → 미타산 → 앵무봉 → 노고산 → 진관사 →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렸다. 때문에 경찰은 파주시 법원읍에서첫 간첩 신고를 접수하고도 이들을 추적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이 발각돼 총격적인 벌어진 곳은 최규식 동상에서 남쪽으로 약 900미터 떨어져 담장을 사이에 둔, 현 청운실버센터 일대였다. 이곳은 청와대와 마주하는 곳이다. 당시 총격전으로 김신조가 생포되고, 30명이 사살됐다. 나머지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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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당시 총격전인 벌어진 곳과 그 때 사망한 최규식경무관의 동상 위치 ⓒ 유영호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동시에 북파공작원 양성을 위해 실미도부대(684부대)를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매년 1월 21일이면 수도방위사령부는 훈련명 '리멤버1.21'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이 사건으로부터 딱 이틀 뒤에 일어난 사건과 연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68년 1.23 미 해군 푸에블로 호 나포사건


1.21사건 이틀 뒤인 1968년 1월 23일,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 호가 동해 원산항 앞바다에서 나포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전쟁 중이 아닌 상황에서 군함이 적군에게 나포되기는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물론 민간 선박으로 위장했지만, 이 배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첩보함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영해를 침범함으로써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미군 한 명이 숨지고 82명이 생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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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포되기 전 1967년 10월에 촬영된 미해군 첩보함 푸에블로 호의 모습 ⓒ U.S. Navy-위키백과


이미 1.21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발칵 뒤집힌 박정희 정권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군사적 보복을 하려고 했지만, 미군은 쉽사리 응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미 해군 소속 푸에블로 호가 나포되자 미군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했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가 급파되고, 오키나와 주둔 주일미군이 한반도로 전진 배치되는 등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조성됐다.

이틀 전 동맹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린 습격사건에 대해 미온적이던 미군이었지만, 막상 자국과 직접 관련된 사건에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대한민국은 완전 배제된 채 북미 비밀회담으로 전개돼 갔으니,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시쳇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게다.

결국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 인정과 재발 방지는 물론이며, 푸에블로 호를 압수당하고 단지 포로와 유해만을 돌려받는 것으로 협상은 종결됐다. 덕분에 북은 그때 나포한 푸에블로 호를 평양 대동강으로 옮겨와 반미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당시는 베트남전쟁 시기였고 이때 북은 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자국의 최첨단 첩보함이 북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통신체계 등 1급 군사비밀이 적국에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본 것과 같다.

한편, 푸에블로호가 전시됐던 대동강 수면 아래에는 이미 또 다른 미국의 선박이 수장돼 있다. 1866년 미국의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평양사람들이 그 배를 불 지르고 수장시켰다. 이처럼 대동강 수면 위아래로 모두 미군의 배가 존재하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북한에 최고의 반미교양물을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두 사건을 통해본한반도 현실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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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한반도 정치군사적 문제를 규율하고 있는 정정협정문. 서명주체에 대한민국이 빠져 있다 ⓒ 위키문헌


여기서 우리는 1968년 거의 동시에 발생한 1.21사건과 푸에블로 호 사건을 두고 다르게 반응했던 미국의 행동을 눈여겨봐야 한다. 명확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휴전 상태라는 점, 그리고 남쪽에서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현재 미군만으로 이뤄진 유엔군사령부라는 점이다.

헌법상 대한민국의영토는 '한반도와 그 외 부속도서'로 돼 있기 때문에 북이 붕괴하면 그 통치권이 당연히 우리에게 넘어온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해방 전후사를 되돌아보자. 일제가 전쟁에서 지고 해방이 되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당연히 자주 독립 국가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한반도엔 38선이 그어졌다. 남쪽을 지휘하던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 제1호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조선영토를 점령한다"였다.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군정을 실시했다.

또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북을 점령했을 때 그곳을 통치한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유엔군사령부였다. 전쟁 중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 생각과 달리 미국과 유엔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은 유엔결의안에 따라 '1948년 당시 유엔이 감시할 수 있었던 남쪽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이며, 북이 붕괴하거나 흡수통일되는 경우 북쪽에 대한 통치권은 여전히 유엔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21사태 #푸에블로호 사건 #서촌기행 #백운동천 #김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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