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와 이야기하다 보면 달구지 끌고 논에 가서, 손에 퉤퉤 침 뱉으며 소 쟁기질하던 이야기며, 여름이면 천렵을 하고, 겨울이면 질퍽한 논에서 삽질로 미꾸라지도 잡던 이야기가 절로 나온다.
pixabay
조씨와 이야기하다 보면 달구지 끌고 논에 가서, 손에 퉤퉤 침 뱉으며 소 쟁기질하던 이야기며, 여름이면 천렵을 하고, 겨울이면 질퍽한 논에서 삽질로 미꾸라지도 잡던 이야기가 절로 나온다. 어려서는 달구지를 탔지만 나이 들어서는 경운기에 트럭까지 몰며 농사를 지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는 큰돈이 되지 않았다. 먹고 살 정도는 됐지만, 많은 이웃들이 한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집을 짓고, 도시로 나가는 걸 보며 조씨도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 오면서 그동안 농사짓던 땅을 중국 한족들에게 소작을 줬다. 같은 값이면 같은 동포에게 소작을 주고 싶었지만, 요즘 연변에서 농사짓겠다는 중국교포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중에는 북에서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에게 몰래 소작을 주기도 하지만, 공안에 걸릴 위험이 많아서 공안과 연이 닿아 있지 않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한다.
"십 년 전에 벌써 농사 때려치우고 한국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사람 중에 소작하겠다는 사람이 종종 있었어요. 저도 한 몇 해는 욕심내서 남의 땅까지 빌려 일해 봤어요. 그때 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일 시키면 잘해요. 요즘은 한족들이 더 많아요."한국에 와서 번 돈으로 2층짜리 집도 새로 지었고, 시내에 가게를 세 주는 건물까지 마련했다. 그런데 연변에 가서 다시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다. 쉰이 넘는 나이에 다시 농사를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힘에 부칠 일도 아니다. 다만 남들 다 떠난 곳에서 다시 농사짓는 게 무슨 낙일까 싶은 거다. 조선족 학교를 나온 조씨는 중국어가 신통치 않다. 점점 늘어나는 한족들 틈바구니에서 산다는 것도 부담스럽고, 친구들이 다 떠난 땅에서 누구와 벗하며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고 한다.
조씨에게 연변은 태어난 곳이지만 어느덧 낯선 곳이 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 죽으로 연명하며 배를 곯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다시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그렇다고 옛 추억이 남아 있고 노모가 계신 땅을 나 몰라라 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내년이면 중국에 돌아가야 하는 조 씨는 요즘 영주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노모가 계시지 않다면 벌써 마음을 굳혔을 일이지만, 선뜻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다.
조씨가 동지팥죽을 한사코 마다한 것은 이제는 입에 대기도 싫을 정도로 물리게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 탓도 있겠지만, 거처를 정해야 하는 심란함도 한몫하는지 모르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6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