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된 이유, <분서자들1>이 말한다

[서평] <분서자들1> 21세기 분서갱유, 일곱 살 아이마저 죽이려 든다

등록 2017.01.23 10:55수정 2017.01.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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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미국에서조차 편집, 배분이라는 작업을 통해 분서를 좀 더 교묘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시인 월리엄 B. 예이츠는 그의 시 '재림'에서 "최상의 사람들은 신념이 부족한데, 최악의 인간들은 맹렬한 열정으로 넘친다"고 한 바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을 보며 그들의 부역자를 자처한 고위 공직자들이나 국회의원, 어버이연합 같은 극우 보수 집단들을 보면 예이츠가 한 말이 대단한 통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 소설가 마린 카르테롱의 <분서자들1>을 읽다 보면 다시 한 번 '최악의 인간들의 맹렬한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에서 분서자들은 세대에 세대를 넘어 집요하며 끈질기게 '사라진 책들'을 찾는다.


그 책들은 오리엔탈 학문과 철학의 토대가 되는 문헌들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처음 모아놓은 것이다. 교황이나 칼리프, 왕, 황제들은 그 책들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 그 책들을 불사르려 든다는 것이 소설을 관통하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일지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죽이려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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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분서자들1> 마린 카르테롱 저, 이원희 역. 작가정신 ⓒ 고기복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분서'는 단순히 '책을 불태움'을 넘어선다. 그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이다. 분서자들이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다. 권력자들에게 분서는 국민을 무지한 상태에 가둬놓기 위한 일종의 통치 행위이다.

이쯤 되면, 문화체육부 블랙리스트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분서자들1>은 21세기 분서갱유라 할 만한 일들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유를 알려준다. 박근혜의 국정교과서 추진과 문화체육부 우수도서 선정 개입, 문화체육부 블랙리스트 작성 등은 영원히 다스리고자 하는 자들의 '두려움' 때문이다. 권력을 무지한 백성에게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가진 자의 두려움' 말이다.

"국민이 모든 지식의 원천에 쉽게 접근한다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니? 아직 사람들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시대였지만 많은 사람이 책을 읽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라고?" p.158.


소설은 기원전 324년 바빌로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독살한 자들이 '분서자들'의 기원이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세상 지식이 백성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무슨 수를 써야 했던 분서자들은 시작부터 암살자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일하게 오리엔탈 학문과 철학의 토대가 되는 문헌들을 소유하게 되었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300년에 이르는 정신의 흐름을 한데 모아놓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적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고, 대왕은 기원전 324년 바빌로니아에서 독살되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독살한 자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적이란다." p.158.

권력자들의 분서는 항상 존재했다

소설을 읽으며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식자층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집단들이 있었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상소를 통해 한글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는 상소문에서 '글자가 너무 쉬우면 백성들이 국법을 쉽게 생각하여 업신여기고, 문자를 공부한 선비를 함부로 여길 것'이라며 그 속내를 드러냈다. 그것은 사대부들이 독점해 왔던 지식, 학문이 보편성을 띌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최만리는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침해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한자가 최고의 가치라 했던 최만리나 분서를 통해 지식 전파를 막고자 했던 분서자들이나 학문과 정보를 독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또한, 감출 것은 감추고 알릴 것은 널리 알리면서 우매한 백성을 지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서자들은 문체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자들과도 닮았다.

역사적으로 '분서'는 금서들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파묻었던 것으로 유명한 진시황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중세 로마교황들은 금서를 지정하고 마녀사냥으로 그들의 열정을 증명했다. 20세기 히틀러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모든 서적들을 불태우고 작가와 학자들을 핍박했으며 유태인을 학살했다.

박정희 이후 군사정권과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온갖 금서 목록을 만들고, 반체제 인사들을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핍박했다. 그들에게 '책'은 체제 선전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설은 그런 분서자들에게 죽음을 마다하고 저항한 이들이 있어왔음을 이렇게 밝힌다.

"16세기 초, 프랑스 동부에서 활동하는 고문서 전파자는 한 인문 신학자에게 복음서 중 미공개 원고들을 폭로하기로 했지. 대부분의 교리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전적으로 계승한 교황들이 구상한 것이며, 특히 연옥의 발명과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상속을 가로채기 위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는 내용이었어." -p.292.

소설에서 분서자들에 맞선 이들은 템플 기사단이라는 결사체다. 그들의 임무는 인류의 중요한 문헌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식 전수 수단으로서의 책의 기능이 예전만 못한 요즘도 분서자들이 있고, 분서를 막는 수호자, 잃어버린 문서를 찾고자 하는 추적자들이 있을까?

요즘처럼 지식정보의 유통과 소비가 인터넷을 통해 폭넓게 확산되는 시대에 과연 '분서'가 가능할까 싶지만, 여전히 이 시대에도 분서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권력자들의 검열과 통제다.

이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미국에서조차 편집, 배분이라는 작업을 통해 분서를 좀 더 교묘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키보드를 누구나 두드릴 수는 있어도 검색창에 누구의 글이나 노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포털과 소셜 미디어들은 정보를 사장시킬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들은 이 시대의 분서자들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책'은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갖는다.

"종이에 쓰인 글을 기술적으로 묶어놓은 '물건'은 독자를 찾는 경우에만 책이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읽히지 않는 책은…책이 아닌 것이다." p.84.

<분서자들>은 3권으로 된 책이다. 르몽드는 이 책을 "일곱 살 천재 자폐증(아스퍼거 증후군) 소녀의 단순명료한 논리적 사고가 책을 지배하고 있다"고 평했다. 일곱 살 소녀와 비밀 결사단의 최종 병기, 오귀스트가 펼치는 이야기는 단숨에 책을 읽게 한다.

다 읽고 나면, 다음 책이 번역되지 않은 시리즈물이라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다. 그러나 1권만으로도 '책'을 지키고, 전파하려는 노력이 역사 속에 있었음을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책의 종말은 곧 인류의 종말의 의미한다" p.88.

이 말은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분서가 마냥 허락되는 세상은 역사가 죽고, 정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소설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분서자들을 감시하고 저항하고 싶다면 적극 추천한다.

분서자들 1 -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

마린 카르테롱 지음,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2017


#분서자들 #블랙리스트 #지식정보 #검열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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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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