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에 빠진 목사, 그가 거리에 나선 이유

느릿느릿 살아가는 박철 목사 "집회 장소가 예배당이고, 목회"

등록 2017.02.05 17:12수정 2017.02.0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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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소녀상 앞 부산 소녀상을 지키려고 경찰을 막고 있는 박철 목사 ⓒ 장영식


지난 2016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1년을 맞는 날이었다. 1263차 수요시위가 열린 날, 낮 12시 40분 부산 시민들이 일본영사관 앞에 처음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기습 설치했다. 이를 본 경찰과 동구청 직원들이 달려들어 철거를 시도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이 장소로 모여들어 철거를 막으려고 나섰다. 하지만 경찰과 동구청 직원들은 소녀상을 껴안고 있는 시민들을 하나둘씩 떼어내고 4시간 30분 만에 이를 강제 철거했다. 시민들 중에는 박철 목사도 있었다. 박철 목사는 구둣발에 허리를 짓밟혔고 경찰에 연행됐다.

소녀상이 철거된 뒤 시민의 반발이 거셌다. 동구청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동구청 홈페이지는 접속 과다로 서버가 다운됐다. 결국 박삼석 부산 동구청장은 소녀상 설치에 관해 어떤 개입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지난해 12월 31일 소녀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양심의 법이 우선한다는 생각으로 늘 이런 집회에 참석하는 박철 목사. 그이는 집회뿐만이 아니라 '핵없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인 연대' 집회,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집회 등 수많은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왜 목사가 그런 집회에 참석할까. 박철 목사는 집회 장소가 예배당이고 그게 목회라고 단언한다.

박철의 어린 시절

박철은 1955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화천군 하남면 '논미리'라는 산골짜기로 이사를 갔다. 박철은 예순이 넘은 지금은 키가 180센티미터로 거구이지만 중3 때까지 158센티미터로 키가 작았다. 초등학교 때는 더 작아 늘 열등감이 있었다. 키가 작은 데다 숫기도 없었고 운동도 소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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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박철 부모님과 형제들 ⓒ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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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박철 형제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박철 목사 ⓒ 박철


"달리기를 못했다. 만날 꼴찌였다. 어쩌다 앞에 달리던 아이들이 와장창 넘어져 3등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내가 머리통도 크고, 귀가 크다. 언젠가 아버지가 '너는 달리기할 때 왜 머리를 좌우로 흔드니?' 하더라. 언제나 행동이 굼뜨고 빠릿빠릿하지 못해 아버지는 나를 미련곰탱이라고 불렀다. 어려선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싫었는데 지금은 좋다. 좀 미련하고 어수룩하게 사는 게 현명하게 사는 거 아닌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지만 박봉에다가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는 군 의무중대가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올 때 가져 온 재봉틀로 군인들 군복에 단추도 달아 주고 바짓단도 줄여 주고 수선해 주는 일을 해서 생계를 이끌어 갔다. 


동네에 조그만 초등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화천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읍내 초등학교는 왕복 30리가 넘었다. 박철은 수업을 마치면 누나를 기다렸다. 하지만 누나는 박철을 싫어해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코를 많이 흘려 창피했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읍내를 벗어나면 같이 간다. 동네 어귀에 도착하면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그러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눈보라도 몰아치고. 나는 귀가 커서 '아이고, 귀 시려' 하고. 누나는 '아이고, 발 시려 발 시려' 하고 울면서 간다. 동네엔 하나둘씩 호롱불이 켜지고, 멀리 우리 집에서도 호롱불이 보인다. 어머니가 호롱불 들고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그걸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호롱불을 들고 마당에 나와 서 계셨을까? 어린 시절 그 호롱불 이미지가 내 삶의 지향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 별명이 '울퉁불퉁'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어떨 때는 아이들을 슬리퍼로 때리기도 하고 시험 보고 나서 성적대로 때리기도 하고, 친구를 마주보게 한 뒤 서로 때리게 하는 폭력적인 교사였다. 어느 날 이 교사가 단편소설을 한 편 써 오라는 숙제를 냈다. 너무 암담했지만 숙제를 안 해 가면 맞을 게 뻔했다. 박철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썼다. 여름이면 개울에 가서 미역 감고 팽이 치고 놀던 이야기였다.

국어시간에 교사가 들어와 숙제를 걷어갔다. 그다음 시간이었다. 그 교사가 "박철!" 하고 불렀다. 박철은 깜짝 놀랐다. 그 교사는 "이거 네가 쓴 거야? 정말이야?" 하고 다그쳤다. 박철이 소심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기가 썼다고 하니 국어교사는 "그럼 한번 읽어 봐" 하고 말했다. 박철은 교탁 앞으로 나와 애들을 바라보고 읽었다. 비록 더듬더듬 읽었지만 자신이 쓴 거라 거침이 없었다. 국어교사는 박철 어깨를 두드려 주며 "네가 썼구나" 한마디 했다. 박철은 그 말이 굉장한 칭찬이었고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글짓기대회는 도맡아 나갔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성격이 예민한 사춘기 때 선생한테 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가 무척 중요하다. '네가 썼구나' 하고 인정받은 게 나한테는 큰 격려가 됐다."

생활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가 박철이 중3 때 생활 전선으로 복귀했다. 본래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신앙으로도 귀의했다. 아버지는 본래 사업 수완이 뛰어난 분이었다. 잡화상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잘 돼 몇 년 사이에 가세가 펴기 시작했다.

대학을 두 번 들어간 박철

박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대 국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1974년, 난생 처음 집을 떠났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고 진보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알았던 세상하고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다. 군사정권 유신정권에 대한 적개심, 분노가 일었다.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라고 할까, 내 안의 모순도 자연스럽게 해소가 안 되니까 매일 술 먹고 아무 데서나 뻗어 잤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데모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박철이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맏아들인 박철을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를 만들겠다는 서원기도를 바쳤다. 박철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있었다. 1979년에 박철은 다시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셨다. 당신의 기도가 드디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나는 막상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회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스스로 목사는 자질이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좋은 장로가 돼서 활동하겠다는 마음은 있었다."

박정희가 무너졌지만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독재를 휘두르고 있었다. 박철은 신학대에서도 여전히 운동권이었다. 그때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이 함석헌이었다. 1958년〈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써서 당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사회운동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이다.

"함석헌 선생 강연을 참 많이 쫓아다녔다.《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분의 세상을 보는 안목에 매료됐다. 함석헌 선생은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으로 세상을 보게 됐다."

박철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1985년 3월 29일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됐다. 1984년 6월에 출범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과 10월에 출범한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통합해 발족한 것이다. 설립 당시 고문으로 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주교 등이 위촉됐고 상임의장에는 문익환 목사가 선출됐다. 박철은 민통련에서 사회운동가를 양성하는 민족학교 1기로 들어가서 1년 가까이 학습했다.

동지이자 연인, 김주숙과 만남

그 무렵 박철은 우연히 한 여학생을 만난다. 어느 날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웬 여자가 "선배님!" 하고 인사를 건넸다. 동기라고 했지만 박철은 처음 보는 여학생이었다. 당시 박철은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했지만 학우들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박철은 그 여학생에게 술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포장마차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여학생 이름은 김주숙이었다. 그이는 수업 시간에 박철이 발제를 하는 걸 보고 괜찮은 선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중에 실토했다.

"민중신학의 흐름이 형성될 시기였다. 민중신학 책 첫 장에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이 나오는데 내가 발제를 하게 됐다. 수업 시간에 노트도 없이 30분 가까이 발제를 했다. 함석헌 선생 강연을 쫓아다니면서 워낙 많이 들었으니 막힘이 없었다. 그때 그걸 보고 그 친구가 나를 보고 괜찮은 선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게 될 무렵 김주숙은 자기 동생이 '김의기'라고 고백했다. 박철은 순간 깜짝 놀랐다. '김의기'. 당시 서강대 무역과 4학년이던 1980년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촉구하며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고 투신한 열사였다.

김주숙 집안은 경북 영주의 한학자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는데 스스로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퇴직금을 친척에게 빌려줬다가 사기를 당했다. 공무원을 하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가 함바집에서 일꾼들 밥해 주고 버는 돈으로 살았다. 지문이 다 지워질 정도로 설거지를 했다. 언젠가 주민등록 갱신을 하러 갔을 때 열 손가락 지문이 하나도 없어서 손바닥으로 찍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집안을 일으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막내아들 의기는 만날 수배당하고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김의기는 살아 있을 때, 이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농민들이기 때문에 농촌교회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의기의 누나 김주숙 역시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서울여상을 나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언론이 통폐합되기 전 TBC방송국 경리 일을 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30일 끔찍이 아끼던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절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김주숙은 동생의 죽음에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동생이 왜 죽었는가. 동생에게 애인도 있었다. 죽을 이유가 없었다. 김주숙은 동생이 교회를 다니면서 변했다고 생각했다. 김동완, 김홍기 목사가 하던 형제교회였다. 박정희 정권 때 김동완 목사는 교인 전체와 머리띠를 두르고 신당동 일대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다 전원이 잡혀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김주숙은 동생의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예수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동생이 다니던 형제교회를 나갔다. 하지만 열심히 교회를 다녀도 만족할 수 없었다. 김주숙은 담임목사였던 김홍기 목사에게 신앙 상담을 받았다. 김홍기 목사는 김주숙에게 신학교를 가 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다닌 곳이 박철이 다니던 신학대학이었다. 김주숙은 독재 정권의 실체를 알면서 동생의 죽음에 대해 의문이 조금 풀렸다. 동생이 추구했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성운동가, 활동가가 될 생각을 했다.

박철은 참 세상 좁구나 생각했다. 둘은 그날로 의기투합이 돼 매일 만나 붙어다녔다. 어느 날 김주숙이 예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마음이 통해 그날 둘만의 약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 있는 사은회에서 박철은 사회자한테 결혼 발표를 한다고 알려 달라는 쪽지를 건넸다.

"사회자가 발표를 했더니 반응이 싸늘했다. 축하도 없고, 박수도 없었다. 나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방만하고 그런 사람으로 주목을 받던 사람이었다. 둘이 늘 붙어 다니는 건 알았지만 둘이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김주숙이 불쌍하다? 뭐 그런 분위기? 하하! 나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박철은 졸업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졸업하면서 박철은 결심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목회자가 되자.' 삶의 초점은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였다. 그리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장자》였다. 박철은 그 세 권의 책을 책 표지가 닳도록 읽었다. 그 책 세 권은 박철의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설정해 줬다.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놓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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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님 감옥에서 출감했을 때 ⓒ 박철


강원도 정선의 첫 목회

박철 목사는 1985년 강원도 정선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다. 담임자가 6개월 이상 못 버틸 정도로 가난한 교회였다. 산비탈에 누덕누덕 기운 것 같은 밭뙈기만 있었다. 쌀은 구경도 못 하고, 감자나 옥수수가 주식이었다. 가을에 농사 끝나고 정부미를 사서 먹을 때만 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생활비는 한 달에 5만 원 받았다. 하지만 박철은 만족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처럼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인정이 많고 선량했다. 교인들은 거의 여자 분들이었다. 성도들이 성경 찬송가를 갖고 다니긴 하는데, 전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생각 끝에 자기 이름이라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내 김주숙과 야학을 시작하게 됐다. 할머니 두 분과 지정자 성도가 입학을 했다. 지정자 성도는 그나마 나이가 가장 젊었는데 한마디로 '구제불능'이었다. 두 글자를 배우면 한 글자를 까먹었다.

몇 달이 지났다. 봄을 맞아 새 학기가 되어서 지정자 성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선 보건소로 건강 검진을 하러 가게 됐다. 전 같으면 여기저기 물어보고 진료실과 방사선실을 찾아다녔을 텐데 어찌된 일인지 방에 써 붙여 놓은 글자를 보니 자기가 다 아는 글자였다. 난생처음 자기 눈으로 글을 읽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검진을 받게 됐다. 지정자 성도는 눈물이 쏟아졌다. 지정자 성도는 주머니에 있던 동전 200원으로 구멍가게에서 100원짜리 빵 하나와 사과 한 개를 사서 십오 리 길을 달려와 박철의 아내 김주숙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실을 알렸다.

"사모님이요, 사모님이요! 지가요, 오늘 글자를 읽었대요! 지가요, 남한테 물어보지 않고 방마다 찾아갔대요! 사모님이요, 증말 고맙대요, 전도사님, 사모님, 정말 고맙대요."

지정자 성도는 김주숙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마침 그날은 수요일, 기도회를 인도하는 날이었다. 박철은 아내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저녁밥 대신 먹으려고 지정자 성도가 선물로 주고 간 사과와 빵을 꺼냈다. 그런데 빵을 봉지에서 꺼내 보니 먹기에는 께름직해 보였다. 겨우내 진열장에서 얼었던 것이 봄이 되자 녹아서 크림이 새어 나와 뭉개져 있었고, 유효 기간도 두어 달이 지나 있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박철 목사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기도회를 인도하러 강단에 섰다. 지정자 성도가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 시간을 기다리라고 있었다.

"준비찬송을 하려고 찬송가를 펼치고 지정자 성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전기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했다. 그때 나는 분명 지정사 성도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정자 성도의 그 고마운 마음을 외면한 것 같아 너무 죄송했다. 그때 기도회를 어떻게 인도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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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목회 시절 강원도 정선에서 첫 목회 때 ⓒ 박철


1989년 4월 어느 날, 박철 목사는 정이 들 대로 든 정선을 떠나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 있는 장덕교회로 임지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강원도 강릉중항교회에서 열린 동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박철 머리에 손을 얹어 준 사람은 당시 KNCC 김동완 목사, 민들레교회 최완택 목사, 강경 제일교회 원형수 목사 세 사람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는 날, 아내와 서울에 사는 어머니가 강릉까지 왔다. 목사 안수식이 끝나고 박철이 활동하던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 소속 목사들과 함께 '타는 목마름으로', '농민가'를 목청껏 불렀다. 그리고 남양으로 돌아가 8년 동안 목회를 했다.

1997년 어느 날 박철 목사는 강화 교동도 지석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됐다.

"이곳으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느님이 이곳으로 보내 주셨다."

박철 목사는 이곳에서 '괴짜 목사'로 통했다. 교단의 부조리나 대형교회 목사의 비리를 발견할 때면 그는 날선 목소리로 항의글을 보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그런 그이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되돌아봤다.

"내가 너무 급하게 살고 있었다. 어려서 성격이 굼뜨고 미련곰탱이었는데 생각도 깊이 안 하고 급하게 살았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한국 사회가 산업화에 진입하면서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경제가 성장하긴 했지만 놓친 부분도 많았다. 스스로 깨달음이 와서 '느릿느릿'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보려고 했다."

대도시 대형 교회를 꿈꾸는 목회자가 많은 시대지만 그는 한 번도 '큰 것'에 마음을 뺏긴 적이 없다. 박철 목사는 늘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성찰하는 시간을 보냈다. 산책길에서 만난 풀잎의 이슬, 교회 종탑에 앉은 딱따구리는 모두 그의 스승이자 "예수의 잔영"이다. 빠른 걸음으로는 만날 수 없는, 작지만 소중한 은총이다. 농촌 목회를 오랫동안 하면서  '느림의 철학'을 농부들로부터 배웠다.

"농사는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이다. 느리게 간다고 일이 잘 못 되는 경우도, 갈 길을 못 가는 경우도 없다. 느리고 작은 것을 소중히 볼 줄 아는 마음, 가난의 영성이야말로 예수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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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열사30주기 추도식 망월동 묘역에서 박철 목사 처남 깅의기 열사의 30주기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 박철


낙제 목사의 느릿느릿 세상 보기

박철 목사는 그때부터 삶의 표지를 '느릿느릿'으로 잡았다. '느릿느릿공동체를 만들고 <오마이뉴스>,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했다. 홈페이지'느릿느릿 함께하는 이야기'(slowslow.org)에 박 목사는 이렇게 써 놓았다.

'신은 외계나 어느 별천지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밖에서 신을 찾는 것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신을 찾기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온 사람이 외국인 300여 명까지 포함하면 천 명이 넘었다. 박철 목사는 계간 잡지도 만들고 열심히 글도 쓰면서 교동도에서 8년을 넘게 살았다.

어느 날 부산의 좋은나무교회에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엔 전혀 갈 생각이 없었다. 아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어머니도 계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더니 펄쩍 뛰었다. "빨리 가라. 박 목사가 시골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고 재촉했다.

2004년 박철 목사는 무엇에 끌리듯이 부산으로 오게 됐다. 시골 목회만 20년을 하다 처음으로 도시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 목회처럼 따뜻하게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부산에서 10년 동안 목회를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늘 허전했고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게 뭘까, 생각하면서 박철 목사는 동네 뒷산을 산책하면서 사색했다.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점점 더 보수화돼 갔다. 보수화된 한국 교회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지 않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조찬 기도회를 통해 독재자 전두환을 축복하고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 주역들은 한기총(한국기독교연합회)을 결성했다.

한기총은 또 2008년 개신교 장로 출신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을 때 사실상 이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신년예배까지 드리는 등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자처했다. 한기총은 또 이명박 정부의 미국 소고기 수입으로 온 국민이 미국 반대 촛불시위로 저항을 할 때 성도들을 동원해 기도회를 열었다. 한기총이 마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이 부각됐다. 대형 교회는 늘었지만 기독교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교인 수는 줄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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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농민 살인진상규명 촉구 대회 발언하고 있는 박철 목사 ⓒ 박철


예수살기 운동

이러다간 한국 교회가 망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뜻있는 신앙인들이 나섰다. 2008년 3월 29일,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예수살기' 전국 창립대회가 열렸다. '2000년 전 예수를 몸으로 살아 보자, 예수의 삶을 따르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 보자'는 순수한 신앙 운동이었다. 이날 총회에서는 조화순, 홍성현 목사를 고문으로, 문대골, 조헌정, 한상렬 목사와 김동한 장로 등을 상임대표로, 총무로 김경호 목사를 선출했다.

'예수살기'가 창립되고 나서 박철 목사는 서울 다음으로 두 번째로 '부산예수살기'를 창립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예수살기'란 말을 써 왔던 그는 예수살기운동의 강력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역사를 외면하고 단지 종교 영역 안에 갇혀 버린 개신교, 삶을 간과하고 단지 말의 잔치로 숨어 버린 개신교는 지금 극심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철 목사는 "이제 예수를 믿는 것으로는 안 된다. 예수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교인만큼 '믿음' 좋은 크리스천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 예수를 '살지는' 않는다. 자기가 믿는 바대로, 고백한 대로 살기는 힘들다. 그래서 예수의 삶을 반추하고, 예수를 몸으로 사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교인들은 복음주의에서 벗어난 박 목사가 하는 목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성 교인들은 박 목사가 하는 모든 일이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옳고 그름 차원이 아니라 신앙관의 차이로 평행선을 달렸다. 신도들은 박철 목사가 양을 돌봐야 하는데 양은 돌보지 않고 너무 데모에만 나간다고,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박철 목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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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시위 부산역에서 1인시위하는 박철 목사 ⓒ 박철


"내가 하는 행동은 예수가 길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던 행동이다. 그게 예수의 마음, 영성이다. 그것도 목회라고 생각하는데 교인들은 자기들을 위한 그런 목사만 바란 거다. '타 종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자로 찍히면 더 이상 설명도 필요 없다. 기성 교인들의 나에 대한 불만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다."

2014년 박철 목사는 마음의 정리를 하고 바로 실천에 옮겼다. 10년 동안 목회했던 교회를 나와 '생명, 평화, 이웃사랑, 정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좁은길교회'를 개척했다.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강단에서 설교한 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 이 시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 저들의 아픔에 깊이 공명하고 공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 고통받는 사람들 자리에 가서 같이 있어야 하는데 제도권이라는 주어진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이제 목회자로서 10년 남았는데 이젠 그렇게 살아 보자고 마음먹었다."

박 목사와 같은 뜻을 가진 교인은 20~30명이었다. 대연동에 있는한 병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좁은길교회의 예배 방식은 달랐다. 목사가 중심이 돼 설교하고 교인은 듣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 예배 방식이 아니었다. 개신교이지만 찬미가, 떼제찬송도 부르고, 침묵하는 예배를 도입했다. 성찰하고, 일주일간 어떻게 살았는지 대화하며 신앙과 삶이 유리되지 않도록 했다. 지난 주일에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일, 고통받는 사람 이야기를 공동기도문에 넣었다.

좁은길교회에서는 행동 수칙도 달랐다. '생명, 생태 목회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참여한다.', '삶과 신앙을 하나로 아우르는 진보적 교회 방향에 대해서 찬동한다.', '한 가지 이상의 단체를 물질로 돕거나 몸으로 봉사한다.', '이웃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다. 사회적 약자나 고통받는 자에 대한 적극적 돌봄에 참여한다.', '민족의 평화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다.' 등이다.

그런데 잘나가던 공동체가 만 2년 만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져 박철 목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주 사소한 일로 공동체가 해산되는 아픔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박철 목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박철 목사는 "좁은 길에 대한 예수의 뜻과는 무관하게 형제애적 신뢰, 자발적 헌신이나 참여, 삶의 실천이 부족했고, 공동체적 신앙 훈련도 부족했고, 모양만 그럴싸하게 만들어졌다고 할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분노, 미움, 증오가 내 안에서 용솟음치고 조절이 안 됐다. 12월 20일, 잠이 안 와 꼬박 날 샜다. 새벽녘에 곰처럼 이부자리에서 웅크리고 있었는데 위에 계신 분이 '박철, 너 할 만큼 했다. 그만하면 됐다. 다 내려놓으렴' 하셨다. 눈물콧물이 쏟아졌다. 자고 있던 아내가 슬며시 일어났다. 꿈을 꿨나 보더라. '여보, 다 내려놓읍시다'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속이 뻥 뚫렸다.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고 나서 산책했다. 쌀쌀한데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한 나뭇잎 하나가 팔랑팔랑 흔들리며 햇빛이 비쳐 반짝반짝하는데, 그걸 쳐다보는 순간 생명의 경외라고 할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천국이 임했다. 하나님이 나를 어루만져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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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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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책 제목 느릿느릿 이야기 책 제목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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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제목사의 느릿느릿 세상 보기 2016년에 발행한 책 ⓒ 안건모


예수는 멀리 있지 않다

박철 목사는 요즘 '거리의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40대 초반에 나왔던 첫 시집, 《어느 자유인의 고백》에 쓴 대로  삶의 영역은 더욱 넓어졌고, 아무것도 걸리적거릴 데가 없으니 한없이 자유롭고 당당하다. 아내가 작년부터 요양사로 일 나가기 시작해서 받는 100만 원이 유일한 수입원이다. 돈 들어갈 데는 많지 않다. 두 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했고, 딸은 공부를 잘해 전교 수석으로 간호학과에 입학을 했고 용돈은 벌어서 쓰고 있다. 박철 목사는 가끔 글을 써서 들어오는 원고료로 용돈을 쓰고 있다.

"교회 목사를 하면서 늘 받기만 했다. 새로운 대안적 교회를, 건강한 교회를 만들겠다고 올인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가족, 아내와 아들을 정성으로 대하지 못했다. 아이들하고도 깊은 대화를 하지 못했다. 교회가 내 삶의 영역이었는데 아이들이 내가 힘들어하는 걸 봤다. 가장 힘든 게 배신감이었는데 내가 표정도 밝아지고 전혀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니까 아빠를 존경한다고 한다. 카톡방에서 서로 있었던 일도 주고받고, 요즘은 정말 행복하다."

박철 목사는 요즘은 사택에 예배실을 꾸며 단출하게 예배를 본다. 길거리 집회장이 교회이고 만나는 사람이 교인이라고 집회에 여전히 참석한다. 이 글 처음에 밝혔듯이 박철 목사는 지난 2016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1년을 맞는 날, 시민들과 소녀상을 지키다가 경찰과 구청 직원들에게 허리를 밟혀 다쳤다.

부산에 온 지 13년 만에 거리의 목사가 된 박철은 행복하다. 그동안 이곳은 박근혜 지지자가 많아 작동을 멈춘 도시 같았는데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고 촛불을 든 시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최고로 많이 모였을 때가 12월 첫째 주다. 20만 명이 모였다. 6월항쟁 때보다 더 많았다.  이젠 박정희 신화가 뒤집어질 때가 됐다. 요즘은 자유 발언을 할 사람들이 학생, 노인 할 것 없이 줄을 서 신청을 못 할 정도다. 집회가 불붙기 전에는 내가 자주 발언했다. 요즘은 나 안 시킨다. 밑천도 떨어졌고 자유 발언 할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박철 목사가 맡고 있는 직함을  보자. 부산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공동의장, 부산예수살기 상임대표를 지내고 있다. 그이가 하는 일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고, 나누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들이다.

예수는 멀리 있지 않다. 2000년 전 예수가 살았던 삶을 따라 살고 있는 박철 목사가 예수다. 
덧붙이는 글 작은책 2월호에 실릴 글입니다.
#안건모 #작은책 #박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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