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속내를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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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속내를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취준 3년 만에 입사한 나는 친구에게 한턱 쏘기 위해 그 동네를 다시 방문했다. 오래도록 치킨 성애자였던 친구의 입맛을 고려해 치킨 집으로 가려는데, 그녀가 제동을 걸었다.
"야, 나 어제도 치킨 먹었어. 오늘은 다른 거 먹자." 나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왜? 너 원래 1일 1치킨 하잖아. 오늘도 치킨 집 가자! 맨날 얻어먹었으니 내가 쏠게!" 눈치 없는 나를 향해 친구는 최대한 담백하게 말했다.
"그거야 너랑 먹을 만한 게 치킨밖에 없었으니 그랬지…."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친구는 늘 연인과 다양한 해산물을 먹으러 다닌다고 했다. 천호동 꽃게탕, 속초 횟집, 오징어순대…. 나중에 집에 놀러 가 보니 와인 병으로 한쪽 벽 선반이 가득했다. 그때는 파스타를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다.
기념일이면 호텔 뷔페에 간다고 했던가. 그 풍성한 요리를 맛본 혀에 치맥은 그저 만만한 메뉴였던 것이다. 매일 집밥과 학식만을 오가며 살았던 나에게는 가장 호화로운 메뉴인데 말이다. 학생 때와 다름없이 곤궁한 처지였기에, 나는 여전히 친구가 치맥을 제일로 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당시 내 심정은 가수 십센치가 노래를 통해 훌륭하게 표현한 바 있다.
"너의 얘길 들었어. 너는 벌써 30평에 사는구나. 난 매일 라면만 먹어. 나이를 먹어도 입맛이 안 변해. I'm fine thank you thank you and you. 우리 옛날에 사랑을 했다니 우스워…." - 십센치, 'fine thank you and you' 중에서
이 '찌질한' 서운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막상 내가 월급을 받아보니, 적금 붓고 학자금 대출 좀 갚으면 생활이 빠듯했다. 점심때 밥 한 끼 사 먹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친구도 도시락을 싸다닌다고 했던 것 같다. 결혼 준비하느라 자기도 허리띠 졸라매던 형편에 나를 만날 때마다 밥을 사 줬던 것이다.
더군다나 1차 치킨 2차 커피까지 다 내던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면 평일 저녁에만 5만 원을 쓰게 된다. 꽤나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근데 그렇게 몇 번을 처먹은 년이 고작 취직해서 쏜다는 게, 뭐 치킨? 이런 배은망덕하고 쪼잔한 년을 봤나!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배신감을 느낄 사람은 친구다. 따지고 보면, 걸음이 느린 나와 함께 걷기 위해 그녀는 느림보 연기를 한 것뿐이다.
유예의 시간을 버티게 해준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