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떡 분할' 38선, 미국·소련이 서로 놀란 이유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③] '38선'은 한국전쟁의 도화선이었다

등록 2017.06.20 05:10수정 2017.06.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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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38선

38선 ⓒ NARA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북한 인민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했다. 이 전쟁은 3년 남짓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1953년 7월 27일, 그 총성이 멎었다. 그런데 그때 북한, 미국, 중국의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내는 강화(講和)나 평화 협정이 아닌, 잠시 전투를 쉰다는 미봉책의 협정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The Unended War)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자유·공산 두 진영 간 대립 충돌한 국제전이었다. 자유진영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미국 등 16개국이, 공산진영은 북한, 중국이 참전했다. 이 전쟁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날 '6·25사변' '6·25동란'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이즈음에 와서는 외국 문헌에 나오는 'Korean War'를 직역한 '한국전쟁' 또는 '6·25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또는 '조선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또는 그들이 미국에 대항해 조선인민군을 도왔다는 뜻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 이웃 일본은 '조선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전쟁은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도 부른다.

한반도 휴전선에서는 아직도 남과 북 병사들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 정전협정 이후도 크고 작은 무력충돌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금세기에 와서도 연평도해전과 같은 돌출사건도 일어났다. 또한 이즈음도 북핵문제나 사드 문제로 남북뿐 아니라 이웃 중국, 일본까지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화약고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은 자유, 공산 양측 150만여 명의 전사자와 350만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a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군 미조리 함상에서 시게미스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이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시게미스 마모루는 1932년 주중대사로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의거 때 폭탄 파편에 중상을 당한 인물이다.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군 미조리 함상에서 시게미스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이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시게미스 마모루는 1932년 주중대사로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의거 때 폭탄 파편에 중상을 당한 인물이다. ⓒ NARA


내가 이 글을 쓰는 근본 취지는 지난날 한국전쟁의 참상을 사실 그대로 보여드리고,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먼저 한국전쟁의 원인(原因)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다. 50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에 어찌 그 원인(原因)이 없겠는가. 그래서 이번 3회 기사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遠因)을 살펴 보고자 한다.

a  1949. 9. 8. 미군이 상륙하자 시민들이 연도에서 환영하고 있다.

1949. 9. 8. 미군이 상륙하자 시민들이 연도에서 환영하고 있다. ⓒ NARA


임자 없는 포도밭


조선(朝鮮)은 예로부터 '고요한 아침, 은자의 나라'였다. 건국 이래 중국을 큰 나라로 받들며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심취한 채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지구 반대편 서구 여러 나라들은 시민혁명으로 왕조국가에서 공화제 국가를 세우고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그들 서구 열강들은 자원 확보와 상품 수출시장을 마련하고자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나섰다. 그 대상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약소국이었다. 이런 가운데 18세기 말부터 한반도 연해에는 그제까지 볼 수 없었던 낯선 모양의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의 군함이거나 무장 상선들이었다.

이 이양선 출현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먹구름으로, 조선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위기로 내몰렸다. 곧 조선은 그들의 눈에는 한낱 먹잇감으로 '임자 없는 포도밭'이었다.

하지만 이웃 일본은 세계 조류를 재빨리 체득하고는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사회로 지향함)로 서구의 문물을 미친 듯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본은 단시일 내 부국강병을 이룬 뒤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일본이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는 배은망덕하게도 지난날 자기들에게 문물을 전해준 이웃 조선이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대륙정벌의 발판으로 한반도를 자기네 손아귀에 넣으려는 '정한론'(征韓論)을 품고 있었다.

a  1945. 9. 9. 서울 시민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미군이 도심으로 입성하고 있다.

1945. 9. 9. 서울 시민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미군이 도심으로 입성하고 있다. ⓒ NARA


한편 조선과 국경이 맞닿은 러시아 역시 마땅한 부동항이 없었기에 오래 전부터 남진정책으로 한반도를 자기네 판도에 넣으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과 러시아의 이런 음흉한 야욕과 오래 전부터 조선과 주종관계였던 중국 간의 충돌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피할 수 없는 형국에 이르렀다.

게다가 아시아 대륙에 새로운 먹잇감에 찾고자 군침을 흘리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 열강들도 대륙진출의 긴요한 교두보 조선에 마구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국제 정세를 전혀 읽지 못한 채 수백 년간 쌓인 적폐로 조정이나 사대부들은 계속 백성 수탈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 곳곳에서는 민란이 일어나는 등, 민심의 이반으로 조선은 나약한 국가가 됐다.

18세기말 한반도는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운이 감돌더니 마침내 1894년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먼저 중국과 일본 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가뿐하게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우위권과 랴오둥반도 등을 차지했다. 그러자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3국은 보고만 있지 않고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이에 화가 난 일본은 1904년 삼국 간섭의 주동국인 러시아와 건곤일척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애초 열강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미국과 영국의 조력도 컸다.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를 통째로 꿀꺽 삼키는 것을 멀거니 그저 구경하면서 절치부심하기만 했다.

a  1945. 9. 9. 조선총독부 중앙 홀에서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중앙 홀에서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NARA


38선 분할

일본은 조선을 꿀컥 삼키고도 그들의 야욕이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탐욕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이듬해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의 탐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듯이 중국대륙을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슬그머니 중국을 지원하자 일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힘에는 버겁지만 겁도 없이 그들에게도 도전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함대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과 동시에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의 판을 크게 키웠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은 파죽지세로 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버마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확대해 갔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로는 그 전세가 반전됐다. 미국은 그곳에 비행기지를 마련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한편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전대미문의 가공할 이 원자탄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8월 9일에 나가사키(長崎)에 떨어뜨리자 두 도시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게다가 그해 8월 8일 소련의 참전으로 만주 관동군조차 허물어지자 최후의 항전까지 불사하던 일본은 다급하게 미국에게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뜻을 밝혔다.

a  1945. 9. 9.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

1945. 9. 9.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 ⓒ NARA


그때부터 미국은 다급했다. 그 무렵 미군은 한반도에서 1000km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군은 곧 한반도를 통째로 점령할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은 어쩌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자 묘안을 짜기에 급급했다.

미 국무성·전쟁성·해군성 등 전쟁관련 3성조정위원회는 1945년 8월 10일 밤 일본의 항복조건이 담긴 '일반명령제1호' 초안 작성 임무를 러스크와 본스틸 두 대령에게 맡겼다. 그러자 이들은 30분 만에 한반도 지도를 보고 북위 38선을 미소 양국 분할 선으로 그은 보고서를 입안했다.

이 보고서가 합참과 3성조정위원회, 국무장관, 전쟁성장관, 해군장관을 거쳐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마침내 한반도를 분할하는 이 보고서는 미국의 '일반명령제1호'로 확정돼 8월 14일 소련 측에 전달됐다.

미국은 소련이 38선 분할점령 안을 수락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우려했지만, 이외로 다음날 소련은 이를 수락한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그래서 한반도 허리를 자르는, 이 겨레에게는 두고두고 비극의 단초가 됐던 원한의 '38선'이 생겨난 것이다.

이 분할에 대해 애초 미소 양국은 모두 놀랐다는 후문이다. 미국은 소련이 쉽게 수락한 데 놀랐고, 소련은 미국이 그은 분할선이 후하게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튼 '38선'은 우리 백성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어진 마른하늘의 벼락과 같은 단장의 선이었다.

a  1945. 9. 9. 미군들이 경례를 하는 가운데 조선총독부 광장에 미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1945. 9. 9. 미군들이 경례를 하는 가운데 조선총독부 광장에 미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 NARA


이 '38선'은 미소 두 나라가 일본이 게워내놓은 한반도라는 전리품을 시루떡처럼 절반씩 사이좋게 나눠가진 '황금 분할선'이었다. 하지만 두 세력 간 한반도에서 충돌은 그때부터 잠복돼 있었다. 일본과 대항할 때는 미소가 동지 관계였지만 그 싸움이 끝나자 그때부터 두 나라는 점차 적대관계로 변해 갔다. 국제간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는 정글의 세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자 자기네 몫에 불만이 생겨났다.

이로 미뤄볼 때 한국전쟁의 원인은 38선에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나약했던, 무능 무지했던 우리에게 있었다. 장님이 개천 나무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이번 회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원인이 된 해방 후 북위 38도선 분단과 미군 주둔 장면, 그 무렵 북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일부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사진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 수집한 것이다.)

a  일제의 패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귀환되는 귀국선 갑판에서 미군들에게 소지품 검색을 당하고 있다.

일제의 패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귀환되는 귀국선 갑판에서 미군들에게 소지품 검색을 당하고 있다. ⓒ NARA


a  1946. 1. 16.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이 연설하고 있다(왼쪽에 앉은 이는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이다).

1946. 1. 16.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이 연설하고 있다(왼쪽에 앉은 이는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이다). ⓒ NARA


a  날짜 미상. 북한 군중대회(왼쪽부터 김두봉, 김일성, 구모조 중국대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

날짜 미상. 북한 군중대회(왼쪽부터 김두봉, 김일성, 구모조 중국대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 ⓒ NARA


[이전 기사] "골로 간다"의 어원,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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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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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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