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의 탄생 / 톰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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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적어도 10만 년 전에 불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그 뒤로 내내 열과 빛을 통제했다. 그리고 우리는 겨우 100년 전에 차가움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10쪽)전기로 작동하는 냉장고는 1918년에 처음 나왔다. 냉장고의 나이는 이제 고작 백 살이지만 세상에 나오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냉장고의 역사는 얼음을 녹지 않게 하거나 음식을 시원하게 먹기 위한 온갖 방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냉장고의 탄생'은 이 과정을 세밀하게 담았다.
더운 지역에선 얼음을 얻기가 아주 어렵다. 눈이 오지 않는 곳에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얼음은 우박뿐이다. 하지만 우박은 너무 빨리 녹았다.
35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귀족들은 시원한 와인을 먹기 위해 노예에게 부채질을 시켰다. 노예들이 쉴 새 없이 부채질을 한 것은 바로 와인이 담긴 흙 항아리. 이 흙 항아리는 지난 밤 물에 담가두었던 것이다. 항아리 표면이 밤새 많은 물을 흡수하게 두었다가 낮 동안 부채질을 하면 물이 수증기가 되어 날아간다.
이때 항아리 표면 온도가 내려가면서 와인이 시원해진다. 이 방법은 땀이 난 피부에 바람을 쐬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따왔다. 증발 냉각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냉장고를 만든 기체열역학의 기본이 되는 이론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자연 상태에서 물질을 차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적용까지 한 셈이다. 다만, 자신이 마시지도 못하는 와인 한 잔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했을 노예들을 생각하면 묵념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여름과 겨울이 분명한 지역에선 겨울 동안 얼음을 모아 여름에 사용했다. 이를 위해 시원한 곳에 저장고를 만들었다. 책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동빙고와 석빙고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겨울에 한강이 얼었을 때 얼음을 캐서 저장했다. 서빙고의 얼음은 주로 요리에 사용되었고, 가장 유명한 음식은 빙수였다. (중략) 왕립 얼음 창고에서 나오는 얼음은 지위에 따라 배분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동빙고에서 중요했다. 동빙고의 얼음은 음식이 아니라 의례에 사용되었다.' 저자가 영국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책을 쓰기 위해 꽤 광범위한 조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국사책에도 이런 내용이 나왔더라면 수업시간에 좀 덜 졸지 않았을까 싶다. 총12개의 장 가운데 냉장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8장에야 나온다. 냉장고는 아주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얼음과 물을 얼고 녹게 만드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과정이 필요했고, 기체의 부피와 압력과 온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보일, 갈릴레오, 토리첼리, 파스칼, 베이컨까지 당대의 철학자와 과학자들까지 모조리 소환해야 했다.
과학과 철학 지식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얽혀 드디어 냉각의 원리를 파악했다. 이들이 알아낸 것은, 자연의 얼음으로는 새로운 얼음을 만들 수 없다는, 지금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리였다.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자연 얼음이 아닌 인공 얼음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고, 냉장고 탄생에 힘을 실어주었다.
냉장고는 식품 산업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아메리카 대륙의 '죽은 고기'가 유럽으로' 갈 수 있었고(256쪽) 뉴욕에서도 캘리포니아의 익은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261쪽). 저자는 식품이 냉장고를 통해 여기저기 전달되는 과정을 '냉장 체인'이라 부르며, 이 체인의 종착지는 바로 가정이라고 밝힌다. 그 중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슈퍼마켓'이다. 슈퍼마켓은 가정용 냉장고의 보급과 함께 등장했다. 슈퍼마켓은 '커다란 냉장고'나 마찬가지다.
책은 냉장고의 미래를 전망하며 끝난다. 냉장고에 안에 든 식품의 종류와 유통기한을 파악해 알려주는 스마트 냉장고가 조만간 지금의 냉장고를 대체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주정거장엔 우주선을 냉각시키는 '우주선 냉장고'가 필요하고 사람들은 수명 연장을 위해 스스로 냉동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냉장고의 진화는 무궁무진하다. 냉장고에 담긴 복잡한 과학 원리와 역사, 사회상, 문화와 미래까지 냉장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냉장고 정리술 | 시마모토 미유키 지음 | 중앙북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