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김현옥 서울시장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시장은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지고 선진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 하에 재임 기간 내내 도로를 뚫고 육교와 지하도, 입체교차로의 건설에 주력했다. 서울시청 8층 간담회실에 걸린 초상화를 촬영했다.
전상봉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지 말아야 농촌 인구가 몰려오지 않는다."서울시장 윤치영은 1963년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도시계획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년 20~30만 명의 인구가 몰려드는데, 만약 도시계획을 잘한다면 서울의 인구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1966년 3월 서울시장 윤치영이 해임되고, 김현옥이 새로운 시장에 임명되었다. 김현옥은 부산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산역전 부두지구 구획정리 사업과 각종 도로 건설에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가 제6대 대선(1967. 5. 3)을 1년 앞두고 김현옥을 서울시장에 임명한 이유는 서울 도심 정비와 재개발을 통해 가시적인 치적을 쌓아야했기 때문이다.
국군수송사령부의 모태인 제3항만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한 김현옥은 곧잘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했다. 피가 잘 통하면 사람이 건강하듯이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시장에 부임하자마자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김현옥은 '돌격'이라 쓰인 헬멧을 쓰고 현장을 누볐다.
김현옥 시장은 1966년 세종로와 명동 지하도 공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도육교를 건설하고, 불광동길, 미아리길, 광나무길 등을 확장했다. 1967년에는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이듬해인 1968년 사창가의 상징과도 같던 '종삼(종로3가 유곽)'을 철거하였다. 또한 1968년에는 여의도 윤중제 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강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1969년에는 서울요새화계획의 일환으로 남산 1·2호 터널을 뚫고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를 확장하는 한편,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방사형도로, 외곽과 외곽을 연결하는 순환도로를 개설하였다. 1969년 12월에는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준공하여 강남 개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김현옥 시장이 시민아파트 건설에 착수한 것은 1969년이다. 1971년까지 3개년 계획으로 240억 원을 투입하여 시민아파트 2천동(10만호)을 짓는 계획이었다. 판자촌이 헐리고 서울 곳곳이 공사판으로 변했다. 1970년까지 금화, 청운, 와우지구 등 32개 지구에 434동(1만7402호)의 시민아파트가 건설됐다. 전쟁을 치르듯 속도전으로 건설한 날림공사의 후과는 컸다. 1970년 4월 8일 지은 지 4개월이 되지 않은 와우아파트가 붕괴하여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직후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났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임면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전시 효과를 위해 군대식으로 속도전을 펼쳤다"는 비판도 있다. 찬반을 떠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추진한 각종 건설사업으로 서울의 골격이 갖춰졌다는 사실이다.
1970년 4월 16일 제15대 서울시장으로 양택식이 부임했다. 양택식 시장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밤낮과 주말도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그는 서울시의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전임 시장이 추진한 여의도 사업을 마무리 짓고, 영동지구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부임 직후인 1970년 6월 9일에는 철도청장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서울지하철건설본부를 설치했다. 그런 다음 1971년 4월 12일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경제부총리 김학렬의 반대를 물리치고 지하철 1호선 공사를 시작했다. 양택식 시장의 최대 공적으로 평가받는 지하철 1호선은 1974년 8월 15일 개통됐다. 얄궂게도 이날 양택식 시장이 사퇴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서울시 주관으로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3핵 도시 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