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후손들, 임진왜란 의병에 적극 참여했다

문위세를 기려 세워진 강성 서원, 문익점도 추가 배향

등록 2017.08.04 13:45수정 2017.08.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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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성 서원 전경

강성 서원 전경 ⓒ 정만진


강성 서원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677-5에 있다. 장흥읍에서 나주시로 이어지는 23번 국도를 따라 40리(12km)쯤 올라가면 도로 오른쪽에 유치면 소재지가 나온다.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내려 옛날 도로로 들어선다. 길가에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중학교, 다목적 복지센터가 줄을 짓고 있다. 복지센터 옆이 강성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 시대에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즉, 강성 서원이 현대 사회의 관공서들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고 해서 어색할 일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원은 번잡한 읍내가 아니라 인적이 드문 곳에 세워졌다. 강성 서원도 본래 이곳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 있던 곳은 수몰되고 2004년 현 위치로 옮겨

본래 강성 서원은 유치면 늑용리 665에 있었다. 늑용리 665는 현재의 서원 위치에서 10리(4km)가량 떨어진 동남쪽 지점이다. 그런데 주소를 검색해보면 거대한 호수에 점이 찍힌다. 서원은 탐진 호가 만들어지면서 2004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서원이 있던 땅은 수몰 지역이 되었다. 서원이 제자리를 잃은 것이다.  

a  강성 서원 강당

강성 서원 강당 ⓒ 정만진


원래 터를 잃었다고 해서 강성 서원이 그 이름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강성(江城) 서원의 '江城'은 문익점(文益漸)의 호이다.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외국인이 가져가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는 목화씨를 몰래 국내로 들여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복 생활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선비로 알려진 인물이다. 서원의 이름에 문익점의 호가 포함된 것은 강성 서원 안에 강성 곧 문익점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서원이 처음부터 문익점을 모셨던 것은 아니다. 1644년(인조 22) 월천사라는 이름으로 사당이 최초로 세워졌을 때에는 임진왜란 의병장 문위세(文緯世, 1534∼1600)만 제향 하였다.

a  문위세 유허비

문위세 유허비 ⓒ 정만진

1734년부터 문익점을 추가로 제사에 모셔


문익점을 추가로 모시게 되는 것은 1734년(영조 10) 이후부터이다. 문위세가 문익점의 9대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뛰어난 선조를 배제한 채 후손만 제사 지내는 부담감이 작용을 했을 법하다. 뛰어난 선조를 서원에 모심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더욱 빛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강성'이라는 서원 이름은 정조가 1785년(정조 9)에 붙여주었다. 

문위세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 좌의병의 양향관(糧餉官, 군량미 모집 책임자)으로 활동했다. 조정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사이의 공백기인 1595년 문위세를 용담(전북 진안) 현령에 임명했다. 이는 조정이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도원수 권율의 『만취당 실기』에도 '문위세가 공을 세움으로써 그(권율)가 조정에 보고하여 (문위세가) 현감이 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조원래 논문 「문위세」).' 

조정과 권율이 인정한 문위세의 공로

조원래는 '임진왜란 시 문위세 일가의 의병 운동은 자신을 주축으로 장흥 남평문씨 가의 부자, 형제, 숙질(아저씨와 조카), 옹서(장인과 사위) 간은 물론 문중의 재종질(7촌)들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일어난 전형적인 일문창의(一門倡義)라는 점에서 주목된다.'라고 평가한다. 일문창의는 한 집안 사람들이 대거 의병에 동참했다는 뜻이다.

문위세 집안사람들의 개인별 의병 활동을 알아본다. 그들 사이의 친인척 관계도 살펴봄으로써 일문창의의 뜻도 헤아려 본다.

a  재실 영모재

재실 영모재 ⓒ 정만진


문위세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전라 좌의병의 군량미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그의 장남 문원개(文元凱, 1562∼1636)는 1592년 7월 20일 보성에서 전라 좌의병의 창의 행사에 참여한 뒤 아버지 문위세의 명에 따라 고향에 머물러 가묘(집에 설치된 조상의 사당)를 지키면서 문위세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아버지가 용담 현령으로 5년 동안 재직할 때에도 아우들과 함께 주변을 지켜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지켜내었다.

차남 문영개(文英凱, 1565∼1640)는 성주와 개령 전투에도 참전했다. 정유재란 때는 동생 형개, 홍개, 여개와 함께 이순신 진영에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어부들의 배를 동원하여 명량 해전을 돕기도 했다. 문영개는 선무원종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문위세의 아들들, 일제히 의병 활동에 참가

3남 문형개(文亨凱, 1568∼1627)도 보성 창의에 동참했고, 성주성 회복 전투에 참전했으며, 무주와 장수 일대의 유격전에도 참전했다. 아버지의 관할인 용담 주변을 수비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았고, 명량 해전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형 영개와 두 동생 홍개 및 여개와 더불어 종전 이후 종7품 벼슬을 받았다.

a  문홍개(문위세의 4남) 유허비

문홍개(문위세의 4남) 유허비 ⓒ 정만진


4남 문홍개(文弘凱, 1571∼1638)도 보성 봉기, 성주성 전투, 명량 대첩에 참전했다. 그는 1604년 선무원종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갓 20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5남 문여개(文汝凱, 1573∼1634)도 보성 봉기, 용담 읍성 방위, 명량 해전 등에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그는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도 형 홍개와 함께 창의하여 가문의 충의 정신을 빛내었다.

사위와 큰조카도 의병에 참가, 공신 책봉

문위세의 사위 백민수(白民秀)도 보성 창의에 함께했고, 남원, 무주, 성주, 개령 등지의 전투에 빠짐없이 참전하였으며, 용담을 지켜내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백민수는 선무원종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문위세의 큰조카 문희개(文希凱, 1550∼1610)도 임란 발발 즉시 창의했고, 정읍 현감으로 있던 정유재란 때에 두 아들 익명(益明), 익화(益華)와 함께 무사히 읍성을 지켜내었다.   

a  문위세의 지형인 박광전의 강학 장소 죽천정

문위세의 지형인 박광전의 강학 장소 죽천정 ⓒ 정만진


문위세의 자형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은 전라 좌의병의 지도자였다. 67세라는 고령과 신병 때문에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전라 좌의병을 일으키고 사람을 모으는 일에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도 72세의 나이마저 잊은 채 의병장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박광전의 두 아들도 모두 의병군으로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박광전에 대해서는 <고령에도 의병으로 나선 박광천, 그를 기리는 서원> 기사 참조)

자형은 의병 지도자, 7촌은 남원 전투에서 순절

문위세의 7촌 문기방(文紀房, 1547∼1597)은 무과에 급제한 장수로서, 임진왜란 내내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는데 1597년 8월 16일 남원성 전투 때 순절하였다. 또 다른 7촌 문명회(文明會, 1560∼1597) 또한 무과 출신으로 문기방과 더불어 선무원종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a  신도비와 외삼문이 보이는 강성 서원의 풍경

신도비와 외삼문이 보이는 강성 서원의 풍경 ⓒ 정만진


개인별 의병 활동을 살펴보니 과연 문위세 집안은 '일문창의'의 칭송을 들을 만한 가문으로 여겨진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의 후손다운 풍모가 뚜렷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풍(家風)이 있고 국민성(國民性)이 있다는 말이 허황된 관념이 아닌 줄 알겠다.

'밥상머리 교육'을 하네 뭐를 하네 하며 억지춘향식 가정교육을 진행하는 사례가 많다. 강성 서원 같은 곳을 부모와 자녀가, 교사와 학생이 손잡고 답사하는 풍토만 조성되면 만사형통이 아닐까 여겨진다. 강성 서원, 좋은 곳이다.
#문익점 #문위세 #박광전 #강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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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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