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2년, 아버지는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

[인터뷰]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등록 2017.08.14 11:44수정 2017.08.1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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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 청년들을 일본, 중국, 동남아, 사할린, 남양군도 등 여러 전선으로 끌고 갔다. 한국 연구진 조사에 따르면 그 수는 최소 120만 명에 이른다.

강제동원의 방식은 다양했다. 남성은 군인·군속(軍屬: 군무원) 등으로, 여성은 '위안부'나 근로정신대원 등으로 동원됐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군함도> 역시 일본 나가사키의 군함도(하시마섬)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강제동원된 이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본인과 명백한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임금조차 제대로 지불받지 못했다. 이들은 탈출할 꿈조차 쉽게 꾸지 못했다. 잡히면 무조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72주년, 풀릴 길 없는 피해자들의 한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도 벌써 7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恨)은 풀릴 길이 없다. 일본이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하며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무관심 속에 유족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살아있는 유족들은 여전히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중심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아래 보추협)' 이희자 공동대표(74)가 있다. 이 대표는 일제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유족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생사를 알기 위해 1989년 유족회 활동에 참여한 이후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뛰어온 세월이 벌써 30년을 바라보고 있다.

a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공동대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공동대표 ⓒ 김경준


지난 9일, 서울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 5층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중간에도 쉴새없이 전화를 받고 팩스를 보내는 등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책상을 슬쩍 엿보니 성인 키만한 높이의 서류더미가 사방에 둘러 쌓여있었다. 모두 그가 직접 수집한 강제동원 관련 기록들이라고 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는 매일 같이 사무실에 출근해 직접 업무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치지도 않고 이 싸움을 이어오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우선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부터 쫓아가보기로 했다.


a  이희자 공동대표의 사무실 모습

이희자 공동대표의 사무실 모습 ⓒ 김경준


외할머니의 기억으로 전해들은 '아버지의 모습'

이 대표의 아버지 고 이사현씨(1921~1945)는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징용령이 발동되면서 이씨 역시 징집 대상이 됐다.

"징용령이 떨어지니까 아버지가 계속 집에 안 들어오고 도망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농부가 농사를 안 지으면 먹고 살 방법이 없지 않나. 도망 다니다 지쳐서 '기왕 갈 거면 빨리 다녀오겠다'고 말씀하시고 떠나셨다."

아버지 이씨가 떠난 것은 1944년 2월의 일이었다. 이씨는 떠나면서 아내와 어린 딸을 장모에게 맡겼다. 남편없는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할까봐서였다. 이씨는 장모에게 "2년만 보살펴달라"고 당부한 뒤 떠났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당시 이 대표의 나이는 불과 2살이었다.

가족들은 이씨가 훗카이도(北海道)의 탄광으로 떠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씨가 가족들 앞으로 보내온 편지에는 "중국 전선에 투입됐으며 전황이 급해 이동 중이므로 답장을 보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가족들은 비로소 이씨가 군속(군무원)으로 전선에 끌려갔음을 알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됐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대표는 자라면서 점점 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꼈다. 이 대표의 외할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손녀에게 매일 같이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이 대표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외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기억이 전부다.

"혹여 손녀가 아버지를 잊어버릴까봐 외할머니가 매일 같이 무릎에 앉혀놓고 아버지 얘기를 해주셨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생기셨구나', '우리 아버지는 중국에 가셨구나' 알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아버지 얘기를 들을 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a  이희자 대표의 아버지 故 이사현씨의 생전 사진 (2006년 8월 13일 광복절 특집 KBS 다큐멘터리 <야스쿠니와의 전쟁> 방영분 캡쳐)

이희자 대표의 아버지 故 이사현씨의 생전 사진 (2006년 8월 13일 광복절 특집 KBS 다큐멘터리 <야스쿠니와의 전쟁> 방영분 캡쳐) ⓒ KBS


이 대표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이자,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은 1989년의 일이었다. 때마침 1987년 6.29 민주화선언으로 각종 시민단체 활동들이 활발해지면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의 활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대표 역시 아버지의 흔적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문을 두드렸다.

유족회 사무실을 매일 같이 들락날락하던 1992년의 어느 날, 이 대표는 사무실 한 켠에 꽂힌 서류철을 발견했다. '피징용사망자연명부'라는 제목의 문서였다. 한참 서류철을 뒤적이던 그에게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이원사연(李原思蓮)'. 그것은 아버지 이사현씨의 창씨명이었다.

아버지는 1945년 중국 광서성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6월 11일 전상사(戰傷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전사한 사실을 뒤늦게 맞닥뜨리는 순간이었다.

a  이희자 대표의 아버지 故 이사현씨의 '병적전시명부'. 1944년 2월 15일 징용령에 의해 징집되어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에서 전상사하기까지의 이동 기록이 상세히 드러나있다.

이희자 대표의 아버지 故 이사현씨의 '병적전시명부'. 1944년 2월 15일 징용령에 의해 징집되어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에서 전상사하기까지의 이동 기록이 상세히 드러나있다. ⓒ 이희자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던 아버지

기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5년 뒤인 1997년, '유수명부'(일본 후생성이 강제동원된 조선 출신 군인·군속을 대상으로 작성한 병적기록부)를 추가로 발견했다. 유수명부에는 아버지 이씨의 공탁금 등록번호와 함께 '합사제(合祀濟)'라는 의문의 단어가 적혀있었다.

그 단어는 아버지 이씨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일제로부터 아버지를 잃은 것도 서러운데,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안 이 대표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합사 기록을 찾아보니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된 건 1959년의 일이었다. 그때면 이미 해방된 지 14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한국의 유족들에게 합사 소식은커녕 아버지의 전사 사실도 통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분했다."

실제로 야스쿠니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다가 전사한 246만 명이 합사되어 있는 것(2001년 10월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조선인 2만 1000명과 타이완인 2만 8000명도 포함됐다.

2001년 6월 29일, 이 대표는 251명의 유족들과 함께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아버지의 야스쿠니 합사 취소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소했다. 기나긴 '재한군인군속재판(아래 군·군재판)'의 시작이었다.

a  야스쿠니신사사무소에서 발급한 '합사확인 증명서'. 1959년 4월 6일 이희자 대표의 아버지 故 이사현씨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는 내용이다.

야스쿠니신사사무소에서 발급한 '합사확인 증명서'. 1959년 4월 6일 이희자 대표의 아버지 故 이사현씨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는 내용이다. ⓒ 이희자


"'하나의 신'이 되었기에 분리할 수 없다"는 일본

이 대표는 일본 내 평화운동 단체들과 함께 야스쿠니를 방문해 아버지의 합사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표가 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던 우익단체들은 야스쿠니 정문을 가로막은 채 "더러운 조센진은 돌아가라"고 소리지르며 위협했다.

이 대표 역시 "더러운 조센진이면 합사를 취소해주면 되지 왜 안 빼주겠다는 거냐"라며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러나 유혈사태로 번질 우려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측문을 통해 돌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면담이 성사되었으나 야스쿠니 측은 이 대표의 '합사취소'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미 하나의 신(神)으로 합사되어 있기에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재판부 역시 야스쿠니의 손을 들어줬다. 1심 판결에서 유족들의 소송을 기각해버린 것이다. 재판부는 "야스쿠니는 종교시설이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야스쿠니에 합사하도록 전사자 명부를 넘겨준 주체가 일본 정부"라며 "모든 건 핑계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건 일본의 정신과 직결된 문제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합사취소를 거부하는 것도 일본의 정신이 흔들린다고 생각해서다."

이후로도 2003년, 2006년, 2013년 세 번에 걸쳐 항소와 상고를 거듭했지만 재판부는 번번이 기각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 대표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a  2013년 10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2차 소송을 제기한 원고단이 야스쿠니 신사에 항의방문하는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희자 대표)

2013년 10월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2차 소송을 제기한 원고단이 야스쿠니 신사에 항의방문하는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희자 대표)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유족들 돕고자 '보추협' 설립

아버지의 신원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이 대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처한 유족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000년 지금의 보추협을 만들었다. 보추협은 일본의 평화운동 단체들과 연대해 각종 조사사업과 희생자 유해 봉환 및 야스쿠니 반대 집회 등을 추진해오고 있다.

특히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보추협이 담당하던 진상규명 업무 역시 정부 업무로 이관됐다. 이외에도 신일본제철, 미쓰비시, 후지코시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들도 도맡아 진행해왔다.

보추협이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하는 활동은 '기록조사'다. 객관적인 기록을 가지고 상대해야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 '날조됐다'는 말로 폄훼하며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으면서 다른 유족들을 만나보니까 다들 기록이 없어서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디서 어떻게 기록을 찾아야할지 다들 막막해하더라. 그런 점에서 나는 이미 아버지의 기록을 찾으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있었다. 그래서 '함께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하게 된 일이 벌써 30년을 바라보고 있다."

a  자신이 수집한 기록들에 대해 설명하는 이희자 공동대표의 모습

자신이 수집한 기록들에 대해 설명하는 이희자 공동대표의 모습 ⓒ 김경준


정부의 진상규명 활동,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해야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우리 정부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역시 2015년 12월 31일자로 활동 종료와 함께 폐지됐다.

그러나 최근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피해자들의 배상 소송에 대해 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유족들은 한껏 고무된 상태다. 더욱이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해 승소를 받아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흘러나온다.

이 대표는 "유족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아픔을 헤아려줬으면 하는 게 큰 바람"이라며 "해방을 맞았다고 하지만 정말 우리가 해방된 나라에서 살고 있나 실감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최근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23명의 이야기를 담은 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를 출간했다. 그러나 정작 이 대표 본인의 이야기는 담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다른 유족들의 경우 스스로 나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말로 차마 다 못할 정도로 가슴 아픈 사연들 뿐"이라며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책에서 언급하지 못한 내용들도 많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나이가 점점 들고 있으니 이젠 일을 줄여나가려고 한다"면서도 마음속에 품어왔던 오랜 숙원에 대해 털어놨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생활을 돕는 '피해자 인권재단'을 세우고 싶다.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또 지금까지 군·군재판을 일본 법정에서 진행해왔는데, 한국에서 재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족들이 고령에 접어들면서 일본을 왔다갔다 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a  보추협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희자 공동대표의 모습

보추협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희자 공동대표의 모습 ⓒ 김경준


15일이면 벌써 72주년 광복절을 맞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통령 아래 정·재계 고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경축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그러나 한쪽에선 광복을 경축하며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을 때,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만큼은 홀로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일제로부터 해방됐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은 일제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꿈꾸며 길고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광복 72주년,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광복절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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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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