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흔히 말하는 '이혼녀'. 다른 말로 하면 결혼제도에 한 번 편입되었다가 탈출한 '탈결혼제도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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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흔히 말하는 '이혼녀'. 다른 말로 하면 결혼제도에 한 번 편입되었다가 탈출한 '탈결혼제도 여성'이다. 7년 전 결혼이라는 걸 했었고, 5년 전에는 또 이혼이라는 걸 했다. 물론 사는 동안 혼인신고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 친척, 지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잘살아 보겠노라고 선언했고, 축하도 받았으니 이혼은 이혼인 것.
당시 이혼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내 인생 전반에 대해 돌아볼 정도로 조금은 힘든 시기를 통과하긴 했다. 그래도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진 않는다. 지금은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이혼한 사실에 대해 어렵지 않게 말한다. 또 다른 여성들과 결혼 생활을 하며 느꼈던 바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눈다.
지금은 이혼을 그저 내 인생에서 지나온 많은 일들 중 하나로 의미 부여하고 있다. 일상에서 이혼한 것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거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기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느끼는 시기가 있으니, 바로 '명절'.
친척들과 부모님이 사시는 곳의 지인분들은 아직도 내가 결혼한 상태라고 기억하고 있다. 혼자 부모님 집에 떡하니 있는 나에게 그들은 한결같이 물어왔다.
"신랑은 왜 같이 안 왔어?" 이혼한 첫해에는 부모님댁에 가며 예상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까 한참 고민했다. 그땐 "아, 신랑이 일이 많아서 저만 왔어요. 명절 지나고 같이 와야죠"라고 말했다. 그다음 해에는 "신랑이 중국으로 파견 갔어요"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다고 질문이 끝나는 건 아니다.
"아이는?" 그 질문 다음에는 서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마냥 "얼른 더 나이 들기 전에 아이를 가져. 부모님이 얼마나 손주를 기다리겠어"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당황스러웠지만 엄마, 아빠 두 분이 지금 어떤 기분이실지 그게 더 신경 쓰였다.
그러기를 몇 해. 명절이면 다른 사람 모르게 도둑처럼 조용히 부모님 댁을 다녀갔고, 때로 지인들이 찾아오면 다른 방에 가서 나오지 않고 있기도 했더랬다. 그렇게 서로가 불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엄마, 아빠랑 같이 저녁을 먹고 있는데 친척 분에게 전화가 왔다. 서로 정답게 추석 인사를 주고받던 엄마.
"응. OO는 아직 안 왔어?" 라고 묻는 친척분의 질문에 "네, OO는 아직 시댁에서 안 왔죠"라고 태연히 답하시는 거다. 나는 눈 시퍼렇게 뜨고 옆에 있는데.
그 전화를 끊은 엄마에게 "아니. 있는 사람을 왜 없다고 그래"라며 타박을 하곤 "그냥 '내 딸 이혼했소'라고 말해버려"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거짓말하며 전전긍긍하시냐고, 요새 이혼한 사람들이 넘치고 넘쳐서 그거 무슨 약점도 아니라며.
그날 엄마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래도 아직은 안 그래, 뒤에서 얼마나 수군대는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결혼 적령기(결혼에 적당한 나이를 정해놓는다는 게 얼마나 우습냐만은)의 여성이 결혼하지 않으면 뭔가 성격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혼해서도 아이가 없으면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게 먼저 찾고, 혹은 몸매 망가질까봐 아이를 안 가지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이혼한 여성에게 붙는 수많은 말들은 또 얼마나 많으랴. 엄마는 나보다 그걸 더 잘 알았던게지. 경험치로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명절을 지나오며 매번 부모님이 거짓말을 하시거나, 지인들의 말에 그냥 모른 척하시는 걸 보며 죄송한 마음이 점점 더 깊어졌다.
"이혼한 내 딸, 더 잘 삽디다" 이 말,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