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차 심부름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나만의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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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사태로 전국에 촛불이 활활 떠오르던 2008년, 지역의 촛불 집회 실무팀으로 참여했다가 촛불이 사그라들 즈음 OO노동조합의 상근자로 활동하게 됐다. 학교 선배의 소개였다.
조합원의 대다수가 남성이었고, 여성위원장 1명 이외에는 지회장을 포함한 조합 간부들이 모두 남성인 노동조합이었다. 그런 곳에 직장 경험이라곤 학원 이외엔 아무것도 없던 20대 중반의 여성이 내가 상근자로 갔으니 그 어색함은 말해 무엇하리. 그래도 이곳에서 노동 운동을 익히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 나의 첫 투쟁은 '커피, 차 심부름 안 하기'였다.
일주일에 한 번 하던 상무집행부 회의날을 빼고, 지회장과 사무국장 그리고 상근자였던 나만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나마 두 분은 나를 '노동운동을 함께하는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마시는 커피나 차는 본인들이 챙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애매해질 때가 있다. 조합원들이나 사측 간부들이 노동조합을 찾아오는 경우다. 일어나서 꾸벅 인사하고 앉는 순간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차 좀 드릴까요?" 질문해야 하는 건가. "좋다"고 하면 내가 직접 커피나 차를 준비해 대접해야 하는 건가.
노동운동을 배워보겠다던 포부는 어디 가고, 매 순간 그렇게 실질적인 고민을 해야 했다. 홀로 치열하게 생각한 후, 내가 내린 결론은 "앉아서 버티기"였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두 분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뒷꼭지가 화끈화끈거렸지만, 그래도 어찌하리. 내 역할을 '차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을 꾸욱 참고 앉아 버틴 것이 한두 번 되다 보니 두 분도 나의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자연스레 자신들의 손님은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다.
나의 두 번째 투쟁은 '간사'에서 '사무차장' 되기. 이름하여, 호칭변경 투쟁!
처음 면접을 보던 날, 날 소개해준 선배와 사무국장과 함께 만나 이야길 나눴다. 사무국장은 나에게 기존의 '간사'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사무실에서 전화 받고, 회계 처리 등의 실무만 하는 '간사'가 아니라 노동조합 운영에 함께 참여하는 '동지'(동지라는 말이 낯설긴 했으나 많은 노동운동 선배들은 그 호칭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가 되어 달라는 요청.
나 또한 회계 처리만 하는 실무자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사무국장과 맘 맞춰 일했다. 지역 곳곳에 있는 분회 방문도 함께했다. 조합원들 이야기도 듣고, 소식지를 만들거나 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항상 사무실에 앉아 있어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간사가 사무국장과 함께 등장하자 조합원들도 다들 낯설어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사무실 전화기를 돌려놓고 신나게 분회 방문을 쫓아다녔다. 그땐 한참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이 있던 시기라 사무국장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평택으로 달려가곤 했다.
조합 간부들도 조금씩 '활동가형 간사'에 적응하던 시절. 사무국장과 함께 '간사'라는 호칭을 사무국장 아래 직급으로 두는 '사무차장'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운영위원회 단위에 안건으로 올렸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이 안건이 뜨거운 논의 안건이 되어 버린 것. '왜 직위를 주어야 하느냐'부터, '간사라는 호칭이 익숙하다'는 의견까지.
다행히 여러 조합 간부들이 '호칭'만 바꾸는 게 아니라 간사의 역할을 더 강화시키는 의미라며 운영위원들을 설득했다. 나는 힘들게 '간사'에서 '사무차장'이 되었다. '호칭 변경이 뭐 별거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겐 '그냥 실무자'에서 노동조합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매우 정치적인 '인정 투쟁'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매번 투쟁의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울고, 웃었던 그때의 그 기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