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밤도망을 감행했다. 아버지의 무능과 오랫동안 이어진 음주 후의 폭력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pixabay
엄마가 밤도망을 감행했다. 아버지의 무능과 오랫동안 이어진 음주 후의 폭력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졌다. 엄마가 아버지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늦은 밤 동네 곳곳에서 엄마가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어른들의 '카더라 통신'이 쏟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 사실이다. 가난과 술과 폭력에 무차별적으로 시달리던 엄마는 의심하지 않고 유혹의 손을 덜컥 마주잡았다. 용기를 내어 지옥의 집을 탈출했다. 열한 살짜리 딸 아이가 발걸음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아이가 매달린 치맛자락을 가위로 자르고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이틀이 멀다하고 취해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손찌검하는 남편. 그 속에서 단 하루라도 더 살아야하는 이유가, 엄마에겐 없었다.
엄마가 떠나고, 한동안 동네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무성한 소문들은, 차츰 나에게로 옮겨와 족쇄가 되기 시작했다. 어쩌다 웃음만 소리 내어 웃어도 "지 엄마를 닮아 아무데서고 끼부린다"는 지적을 받았다.
무엇을 입든 양다리를 조신하게 붙여 앉았다. 셔츠 단추는 목 끝까지 잠궈 입는 것이 당연했다. 손톱에는 투명 매니큐어조차 바를 수 없었다. 새빨간 립스틱은 만져볼 수도 없는 신기루였다. 여자는 조신하고, 단정하고, 순하고, 착해야 한다는 삶의 지침들이 쏟아졌다.
나를 가둔 삶, 딸은 다르길 바랐건만...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내가 엄마 유일한 분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행해지는 징벌과 폭력은 잔인했다. 누구보다 나다운 삶은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때때로 내가 선택한 색으로 나를 치장하고 싶은 자유로움을 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포기와 시간과 인내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나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 점점 희미해지는 날들이 계속 되면서, 나는 세상이 마구 정해놓은 기준에 부흥하고자 무채색의 삶을 택했다.
삼십대의 어느 날, 동료 직원이 물었다.
"주임님, 여자가 서른이 넘어서도 화장을 하지 않는 건 세상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이후 마흔이 넘었을 때, 어느 컨설팅회사 대표는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김 과장, 여자 마흔 넘었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이제 큰~일 났다." 내가 화장하지 않는 게 게으르다고 탓하는 직원에겐 "저마다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다르지 않겠느냐"고 제법 고수 같이 답했다. 컨설팅회사 대표에겐 "그럼 이제 대표님 사모님도 세상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겠다"고 대꾸하고 치워버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일하는 여성을 외모로 단정지을 것인지 몹시 화가 났다.
결혼을 하고 이듬해 첫 딸을 낳았다. 나는 딸아이의 삶을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았다. 나의 사견과 세상의 편견들 중 그 어느 것도 아이와 결부시키지 않으려 했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자 했다. 이 아이에겐 살고 싶어 도망친 엄마가 없으니, 눈치를 보거나 주눅들지 않길 바랐다. 자신을 찾는 걸 포기하거나 나중으로 미루다 영영 잃어버리지 않길 바랐다.
아이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는 삶을 원했고, 곧 외교관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이의 열정이 약간은 미치지를 못해 무역을 택했다. 무역을 전공한 후 해외영업 전문가가 되고자 했다.
아이는 삶의 구김살이 없었다. 보기에만도 시원한 푸른색 계통의 줄무늬 오프숄더 원피스를 예쁘게 입고 다녔다.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캔 맥주 꾸러미를 들고 와 제 아빠를 찾기도 했다. 아이는 당당하고, 예뻤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나는 생애 처음 유쾌한 삶을 맞이할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 평온함이 찾아온 거다. 아이의 2년 반짜리 연애가 데이트 폭력으로 점철되기 전까지, 앞으로 내 남은 삶이 계속 행복할 거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가해자의 주장은 일관됐다. '감히', 딸 아이 측에서 먼저 이별을 통보했다는 데 화가 났다고 했다. 2년 반을 아무 일 없이 만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변했고 이별을 통보했다는 거다. 그 사실을 본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고, 딸 아이를 포기 할 수 없다고 했다. 300여 통이 넘는 욕설 문자들이 매일같이 딸 아이의 휴대전화에 쌓였다.
외출하는 도중, 아이 앞에 나타나 아이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고함을 지르고, 주먹 행세를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위험과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나중에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여러모로 상황이 많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