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노동 해방'이라는 거창한 꿈을 꾸게 된 26살 청년 윤관석이 택한 곳은 인천이었다.
남소연
배추장사 하던 김씨는 용접 일을 시작한 후 한 달에 180시간 잔업을 이어갔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말에 나와 일하더니 결국 의자만 보면 앉고 싶다고 했다. 결국 진폐증 진단을 받았다. 쇠를 녹인 후 쇳물을 흘려 붙이는 기술인 용접일을 하다 보면 미세한 금속이 공기를 떠돌 수밖에 없다. 방진 마스크를 해도 환기가 이뤄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노동자들은 서서히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바꿔야 했다.
그렇게 쌓인 세월 8년, '아다리'(광각막염)는 수시로 찾아왔다. 강한 빛에 노출돼 눈 혈관이 팽창해 생긴 병이었다. 저녁부터 아프기 시작하면 밤새 앓았다. 내내 눈 속에서 자갈이 굴러다니는 거 같았다. 진통제밖에 약이 없었다. 거기에 기침도 더해졌다. 도통 감기가 낫지 않아 병원을 찾으니 진폐증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용접일을 놨다. 그래도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고 외곽 지원으로 노선을 바꿨다.
"우유배달 하는 모습 본 아버지 몸져 누워... 금강산 관광 못 시켜드린 게 한"10년 동안 "국가와 대의를 위해" 사느라 정작 집안 문제는 신경을 못 썼다.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닌다"는 아버지와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하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아버지에게 들켰다.
1989년 공장을 그만두고 노동단체 운동을 시작할 즈음, 생계를 위해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비가 오던 날 배달용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우유가 다 깨졌다. 한푼이 아쉬웠던 그는 이리 저리 뛰며 깨지지 않은 우유를 건지기 위해 분투했다. 그 종종 거리는 모습을, 아들을 만나러 온 아버지가 고스란히 보고 말았다. 말없이 돌아선 아버지는 몸 져 누으셨다고, 나중에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의절하라고 할 정도로 상처를 받으셨나 보더라고요. 우유배달이라니...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켜놨는데 많이 실망하셨겠죠. 아마 상당히 배신감을 느끼셨을 거예요."어렸던 그때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원망도 있었다. 지금은 후회만이 남았다.
"아버지가 이북 분이신데, 2002년에 돌아가셨거든요. 1998년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는데 얼마나 고향에 가보고 싶으셨겠어요. 모시고 갔다 올 기회는 분명히 있었는데 저는 시민운동하고 있고 정규직도 아니고 여력이 없었어요. 핑계죠. 운동에만 집중하다 불효를 저질렀어요. 그게 제 한이에요."기름밥 먹은 세월 10여 년. 이후 각종 시민단체, 노동단체를 만들고 단체가 없어지고 합쳐지면 또다시 단체를 만들고... 그렇게 또 1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사이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우유배달을 하며 생계비를 벌어야 했다.
"저라고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가슴에는 우주를 품고 살지만 돈도 없고 다들 무시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었죠. 제가 스무살이던 시절에만 해도 독재를 무너트릴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각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래도 '결국은 이긴다'는 생각으로 버틴 거예요." 지금의 20대와 다르지 않게, 그에게도 20대는 '불안' 자체였다. 그럼에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용접 불꽃같이 살았어요. 본인이 크게 타오를 수 있는 그게 뭔지, 그 불꽃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우리 청년들이 자신의 불꽃을 키울 수 있게 돕는 역할을 정치가 해야죠. 취업 문제 등 청년의 아픈 곳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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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푼 아쉬워 우유배달 하던 청년, 국회의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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