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평화바람
3.1 구국선언, '당당히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김지하 시인 구명 운동을 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뜻을 모아 1976년 3월 1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미사를 거행했다. 문정현 신부는 2부 구국 기도회에서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가 쓴 호소문을 대신 읽었다. 그리고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이우정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유신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3·1절 미사를 '3·1 명동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고 국가 전복 내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는 3·1절의 종교 행사를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경찰은 문정현 신부가 자고 있던 전주 해성학교 기숙사에 들이닥쳤다.
"기숙사에서 잠자는데 새벽에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됐다. 마당까지 다 파헤쳤더라. 전주경찰서에서 서울시경으로 갔다. 거기 들러서 남산 육본 밑에 한성산업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으로 갔다. 2층집이었다. 몇 사람이 와 있었다. 얻어맞지는 않았다. 안기부 요원 세 명이 붙어서 며칠 동안 잠을 한숨도 안 재웠다. 다시 중정 6국으로 끌고 가더라. 거기서 4일 밤낮으로 조사받았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조사를 받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겁이 나기보다는 더 이가 갈리고 용기가 났다. 다시 검찰청으로 가서 구속됐다.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신부 셋이 모두 구속됐다는 소문을 거기서 들었다."문정현 신부는 연행된 뒤인 두 달 만에 면회가 허락됐다. 동생 문규현이 신부 서품을 받는 날인 5월 3일, 어머니와 문규현 신부가 면회 와 처음으로 만났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뵐 텐데 울까 봐 걱정 많이 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는 쫓아오더니 허리를 잡고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 돼야 돼' 아, 참. 대견한 어머니다. 울고 그럴 줄 알았더니. 대견한 어머니다. 평생 우리를 위해서…." 문정현 신부가 감옥에 있던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문정현 신부는 '유신정권'이 종지부를 찍는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지만 곧 공포심이 생겼다. 철창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오는 건가?' 무서움에 떨었다. 좁은 방을 뱅뱅 돌며 기도를 했다.
"'내 생명을 구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내가 끌려가 죽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아무 일 없이 1979년 12월 8일 문정현 신부는 석방됐다. 1980년 1월 16일 전주 중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 전주 중앙성당은 주교좌성당이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문정현 신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김재덕 주교가 대외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전두환 정권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미사 때마다 정치에 군인들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미사 중에 정보 계통 사람들이 눈에 띄면 미사를 중단하고 내쫓아 버렸다. 신자들 중에는 겁먹는 사람도 있었고, 문 신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5년 문정현 신부는 전주 중앙성당에서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에 있는 장계성당으로 부임했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많이 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부터 노풍 피해 보상 운동, 취락 구조, 소 파동 싸움도 굉장했다. 군청을 점거하고 경찰지서에다 농민 깃발을 꽂고, 잡혀가고, 꺼내 오느라고 단식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 시골 바닥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성당에 최루탄이 날아 들어오고… 무전기를 뺏긴 경찰이 소방차를 가져와서 성당 화장실을 퍼 내고… 피 터지게 싸웠다."'분신 같은' 오두희와의 만남, 노동운동의 시작 문정현 신부는 1988년 익산(당시 이리) 창인동 본당 신부로 부임했다. 거기서 '익산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온 오두희를 만났다. 학생운동 이후 '전북 지역 최초 여성 위장 취업자'였다. 수배 생활은 길었다. 꽤 오랫동안 공권력을 피해 성당에 숨어 살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이른바 '유화 국면'이 시작됐을 때 많은 수배자들처럼 오두희도 수배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가톨릭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던 '군산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이 됐다. 지금도 평화바람에서 함께하고 있는 그는 26년 넘도록 분신처럼 문정현 신부의 사목 활동을 받쳐 준 동지가 되었다.
그 무렵 익산에서는 쌍방울·한성·경성고무 따위의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새로 부임한 문정현 신부에게 쉽게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문정현 신부 역시 핍박당하는 노동자들 속에 있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에 미숙한 점이 많았다. 노동자의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았다. 어느 날 노동자의 집에 들렀다. 사제관 아래 아주 가까이 있던 노동자의 집에서 밤새도록 소주병 부딪치는 소리, '찍찍' 베 찢는 소리가 났다. 화염병을 만드는 소리였다. 참다못해 인터폰으로 소리를 질렀다. "밤새워 화염병을 만들 거야?" 노동자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회 나가잖아. 경찰이 페퍼포그 쏘잖아. 시위 현장에서 어린 노동자들이 경찰한테 맞아 다친 채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화염병 더 없냐? 왜 그거밖에 안 만들었어?' 하고 소리쳤어. 이율배반이야. 당하다 보니까 노동자 계급성을 깨달아. 그 사람들한테 뭐 이익, 도덕을 따지냐. 굼벵이가 밟혔어. 꿈틀거리는 건데. 이런 의식으로 변하더라고."문정현 신부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조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을 배우고 연주하게 된 것도 노동자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행진풍의 노동가요를 멋지게 연주해 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시위 현장에서는 격려해 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성당은 늘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고, 집회의 마지막 집결지는 항상 그곳이었다. 그때는 창인동성당이 '노동자 투쟁의 메카'라는 소리도 들었다.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모이면 경찰들은 성당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 대고, 노동자들은 돌멩이로 막으며 대치를 했다. 그때마다 문정현 신부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앞막이를 충실히 했다. 그렇게 차츰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 갔다.
조성만의 유서, 실형 받은 동생... "이겨 내자"5공화국이 막을 내릴 무렵 문정현 신부는 또 다른 의식을 일깨워 준 존재를 만난다. 그이가 직접 영세를 주었던 제자, 조성만이다. 조성만은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성당 벗들을 바라본 뒤 할복 투신했다. 스물넷 짧은 삶이었다. 유서에는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울시청에서 장례 행렬이 100만 인파였다. 모교에 왔고, 집을 들러서 망월동으로 갔지. 나보다도 걔가 지금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니까. 당시는 내가 성만이의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성만이가 나의 스승이지."조성만의 죽음은 통일 논의에 물꼬를 텄다. 주한미군 문제와 통일 문제를 하나로 바라보게 해 준 계기가 됐다. 그동안 문정현 신부가 매달려 왔던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들이 결국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됐다. 그 무렵 임수경이라는 대학생이 방북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문정현 신부의 동생 문규현 신부는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정현은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하여금 문규현 신부를 이북으로 보내 임수경과 함께 분단의 장벽을 넘어오게 했다. 문규현은 판문점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3년 5개월 실형을 살아야 했다.
"문규현 신부가 임 씨와 함께 걸어서 휴전선으로 들어온 뒤에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와 면회를 갔지. 몸이 반쪽이더라고. 이게 다 내 작품인데, 피눈물이 흘렀지.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어머니는 김대건 신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고생했다, 이겨 내자'라고 한마디 했지."문정현 신부는 1995년 메리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TH) 학위를 받은 뒤에 페루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8월 말 전북 군산의 오룡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고 연락이 와서 서둘러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군산에서는 미군기지 활주로 사용료 문제가 불거져 있었다. 우리 민항기들은 군산 미군기지 활주로를 사용했고 사용료와 유지보수비를 미군 측에 지불해 왔다. 그런데 1997년 초, 미군 측은 그 비용을 4배 이상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말이 되지 않지. 우리 땅을 공짜로 내주고 기한도 없이 사용하면서 우리 민항기가 활주로를 사용한다 해서 사용료를 받고 유지보수비까지 내고, 거기다 또 4배까지 올려 달라 한단 말인가?"문정현 신부는 '활주로 사용료 반대를 위한 군산시민모임'을 조직해서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문 신부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반미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활주로 사용료 인상안 일부는 철회됐다. 문 신부는 또다시 1998년 5월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과 3년간의 군산 미군기지 싸움에서 비로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소파)의 불평등을 실감했다. 미군기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피해나 미군의 범죄에 대해 한국 정부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정부는 군산 미군기지에 무단침입을 했다는 혐의로 문정현 신부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런 모순은 군산만의 일이 아니라 미군기지가 있는 이 땅 곳곳의 문제이며, 오키나와·괌·하와이·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정현 신부는 이런 모든 원인이 소파(SOFA), 즉 한미행정협정 또는 주둔군지위협정을 불평등하게 맺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소파 개정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끈질긴 투쟁 끝에 2001년, 소파는 또 한 차례 개정됐다. 살인, 강간, 유괴 등 12개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 범죄자의 신병 인도 시점이 '재판 종료 후'에서 '기소 시점'으로 바뀌었고, 미군은 한국의 환경 법령을 존중한다는 특별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소파의 불평등 조약이 어느 정도 개선된 셈이다. 그 이후 미군 범죄가 꾸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가 바라는 세상은 아직 아니었다. 2002년 여름, 미군 장갑차 사고로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한국은 소파협정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미군 측은 이를 거부한 채, 자기들끼리 재판을 했고 가해자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2002년 겨울, 분노한 시민들 10만이 광화문 일대에 모여 촛불 시위를 했다. 문정현은 그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언젠가는 이 땅에도 평화가 흐를 것이라 믿었다.
"약장수처럼 평화를 공유하자" 평화유랑단의 시작 그 무렵 미국이 9·11 사건을 빌미로 석유를 겨냥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국익을 위해서 전투 병력이 아닌 의료·후방 지원을 맡는 지원부대를 파병한다고 결정했다. 문정현 신부는 놀랐다.
"우리도 이미 전쟁을 겪어 그 비극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분단이 된 상태이고, 이로 인해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또다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국익을 앞세워 참여한다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정부가 파병을 하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란 오명을 써야 했다."문정현은 평화유랑단을 만들고자 했다. 옛날 '약장수'처럼 사람들이 모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담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유랑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환경운동단체·노동운동단체·인권운동단체·사회복지운동단체를 만나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자, 또 각 지역의 현장에서 판을 벌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람이 모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려니 음향시설도 필요하고, 영상시설도 필요하고, 또 기본적으로 흥을 돋울 수 있는 악기도 필요했다. 다행히 70년대산 독일제 벤츠 미니버스를 마련했다. 미술행동센터에서는 차에 그림을 그려 주어 일명 '꽃마차'란 평화유랑단의 마스코트가 탄생하게 됐다.
인터넷을 이용해 단원을 모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다. 생태·환경·인권운동을 하던 사람, 아나키스트, 윤여관 선생, 노래 잘하는 보리, 고철. 전주·인천·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7명이 모여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을 결성했다. 거기에 문정현과 오두희까지 아홉 명이 2003년 11월 14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발대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