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지하실에 '예수 전시관' 만든 남자

문은희 화백과 나눈 필담과 편지를 통해 본 운보의 삶과 예술

등록 2017.12.26 11:20수정 2017.12.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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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문은희 화백이다. 문 화백이 운보의 제자로, 평생 교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문 화백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친필과 서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운보미술관의 작품, 문 화백과 나눈 필담과 편지를 토대로 운보의 삶과 예술을 정리했다. 문 화백은 운보 사후 운보미술관 운영에도 관심을 가졌고, 운보 제자들로 구성된 운사회의 중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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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집 ⓒ 이상기


운보 김기창 화백은 1984년부터 어머니의 고향인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로 내려와 운보의 집을 짓고 살았다. 운보의 집은 고풍의 전통 한옥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어 문화예술 공간으로는 제격이다.


운보의 집이 문을 연 것은 1984년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운보의 집은 안채인 운보화실, 사랑채, 정자, 연못,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에는 운보 김기창 선생이 살았고, 사랑채에는 집사들이 살았다.

운보화실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다. 방 밖으로는 툇마루를 둘러 사방에서 정원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대청에는 운보화방(雲甫畫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상서로운 동물인 거북과 한 쌍의 물고기 조각이 있다. 이곳에서는 창호지문과 유리문을 통해 사방을 내다볼 수 있다. 대청은 인체로 말하면 가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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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및 취미실 ⓒ 이상기


방은 작업실, 오락 및 취미실, 거실, 침실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실에는 운보 선생이 사용하던 화구와 화판, 가구가 전시되고 있다. 의자에는 말년에 쓰던 지팡이가 두 개 걸려 있다. 작업실이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만큼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관리인들이 매일 쓸고 닦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락 및 취미실은 필자가 붙인 이름이다. 그것은 이곳에서 악기, 도자기, 목각제품, 민예품 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보 선생은 화가지만 음악에도 굉장한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거문고와 가야금 그리고 북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작품 '아악의 리듬(1967년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불거나 연주하거나 친다. 관악기로 피리와 대금, 현악기로 해금, 타악기로 장구가 보인다. 그런데 이들을 연주하는 악사들에게서 역동성이 느껴진다. 그런 측면에서 운보의 동양화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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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의 리듬 ⓒ 이상기


운보는 음악에 대한 식견도 대단하고 주장도 분명한 사람이었다. 특히 전통음악에 토대를 둔 그의 민중음악론은 새겨들을 만하다. 그것은 문은희 화백과 주고받은 필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면 거짓말일까요? 모차르트나 그런 외국작곡가 음악가들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관심을 지닌 음악은 우리나라 창(唱)의 가락에 있어요. 얼마 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씨가 우리 청주집에 뜻밖에 왔어요. 그 당시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한국의 가야금 퉁소 등 아악의 가락과 음률을 바이올린에 재현해보라고 권한 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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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와 문화백이 나눈 필담 ⓒ 이상기


그 후 정씨는 이대 음대 황(병기)교수를 만나서 여러 가지 우리나라 음악에 대한 지식을 얻어가지고 갔어요. 난 이렇게 생각해요. 오늘의 세계 음악계에서 서양음악이 날뛰고 판을 치지만 아프리카의 신나는 음악과 우리 동양 특히 한국의 가락은 세계적인데 그걸 인식하지 못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음악이 진정 민중음악으로 세계적 수준인데 그걸 파헤쳐보려는 음악가가 없어요.


본능적 미의식으로 수준 높은 민족이 아프리카 사람들입니다. 다음이 우리 한국 옛 할머니들로, 그들의 미의식은 참으로 훌륭했어요. 우리나라 음악이 가련하고 슬픈 이유가 그 당시 사회환경 탓이고, 중국의 영향으로 그리 됐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런 노래가 대표적입니다. 흥겹고 슬프고 원망스러워요. 날라리 가락, 목청이 찢어져라 부르는데, 어쩜 부르는 게 아니고 울부짖고 포효하는 창처럼 들려 참 좋아요. 그게 바로 민중음악이에요. 민중미술은 민화고 민중문학은 <춘향전> <심청전> 등인데, 요새 민중예술론이 대두되고 있어요." (1987년경 나눈 필담)

지하실은 '예수의 생애 특별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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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먹은 새 ⓒ 이상기


거실과 침실은 사적인 공간이다. 거실에는 운보와 우향 관련 사진과 패널들이 걸려 있다. 패널은 20년 단위로 나눠 운보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1940년대는 "격정과 자유의 독자세계"를 구축한 시기다. 1960년대는 "이미지 시리즈, 심상의 세계로" 시기다. 1968년 작 '태양을 먹은 새'가 눈에 띈다. 새의 머리와 몸을 불덩어리로 표현했다. 운보는 이 그림을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 "우주로 비상하여 우주 자체를 집어삼키고 싶은 심정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는 "무욕의 경지, 순수의 행위" 시기다. 점과 선, 문자를 통해 해탈과 득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런 표현을 쓴 것 같다. 이들 그림의 운필과 획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러한 경지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평론가는 이 시기를 "심상예술과의 조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보의 예술은 워낙 다채롭고 변화무쌍해서 인물, 산수, 풍속, 추상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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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 이상기


침실은 운보의 가장 내밀한 공간이다. 방 가운데 침대가 있고, 벽에는 병풍을 둘렀다. 병풍에는 운보의 집에서 찍은 말년 사진이 붙어 있다.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에 탕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었다. 전형적인 한국 노인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운보는 전통을 지키며 동양화의 길을 걸어간 마지막 화가다. 침대에는 호피가 깔렸고, 죽부인이 놓여 있다. 운보가 마지막까지 쓰던 것으로 추측된다. 침실 양쪽으로는 옷장과 반닫이가 놓여 있다.

1층이 생활공간이라면 지하는 전시공간이다. 지하실에 '예수의 생애 특별관'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예수의 생애 그림을 그리는 운보의 사진이 걸려 있다. 운보는 1952~1953년 처가인 군산으로 피난 가서 이들 그림을 그렸다. 군산의 처가에서 전쟁이라는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해 그리고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며 이 그림들을 그렸다고 한다. 예수생애도는 30개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태고지'로 시작해서 '부활'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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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힘 ⓒ 이상기


이들 그림에서는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천사와 사제가 모두 한복을 입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나온다. 산천초목도 우리나라고 집과 마을 도시도 우리나라다. 예수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다가 부활해 하늘나라로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운보는 이 그림들을 "나의 심혼을 바친 갓 쓴 예수의 일대기"라고 말한다. 운보의 예수생애도는 운보의 예술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작이다. 그것은 서양적 예수를 동양적 예수로 재탄생시킨 대담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운보는 1950년대 예수의 생애를 통해 천주교와 예술적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으로 연결된 것은 1985년이다. 운보 나이 72세 때 성 라자로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운보는 당시의 심정을 소원 문은희에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몸은 72세지만 영혼은 1세야. 작년 김추기경께 영세 받았어. 늙고 병든 영혼 72세짜리는 수술해서 치웠어. 지금 내 영혼은 1세짜리, 맘은 15세. 그런 것 신경 안 써 나는. 100년 자신. 정신력이 수명 연장의 모멘트" (1986년 나눈 필담)      

운보미술관에 남아 있는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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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동상과 운보미술관 ⓒ 이상기


운보미술관은 운보화방 동쪽에 별도의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입구에는 운보 동상이 있고, 건물 벽에는 운곡 김동연이 쓴 운보미술관 한글 편액이 걸려 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운보의 연보와 미술세계를 설명하는 패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운보의 미술세계를 4기로 나눠 설명한다. 1930-50년대 작품으로는 1937년 '고담(古談)'부터 '예수의 생애'를 거쳐 1955년 군마도(群馬圖)까지 소개되고 있다.

1960~1970년대는 운보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기로 설명된다. 강력한 필선과 대담한 구도, 수묵과 채색 등에서 절정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청록산수가 이 시기의 작품이고, 세종대왕 표준영정이 1973년에 완성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태양을 먹은 새'도 이 시기 작품이다. 그는 이 시기 도자기 그림도 그렸다. 1970~1980년대는 모든 것을 초월한 바보산수 시기라고 말한다. 그림에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자유, 일탈의 미학, 천진성과 순수성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왔다고 한다. 화조도, 십장생, 문자도 등에서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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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운보의 삶과 예술 ⓒ 이상기


1980~1990년대는 앞에서 언급한 "심상예술과의 조우"기다. 이때 운보는 판화작업을 시작하고, 대걸레와 큰 붓을 사용해 퍼포먼스를 하며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다. 힘찬 필치와 형태의 파괴가 두드러진다. 1993년 팔순을 맞아서 운보는 자신의 미술을 돌아보는 회고전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한다. 이때 김대중 대통령이 전시장을 찾기도 했다. 2000년에는 "바보예술 88년, 운보 김기창 미수 기념 특별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1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운보미술관에 전시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황소, 백두산 천지, 수리, 기러기, 화조도, 누드, 태양을 먹은 새, 문자도, 군마도, 산수도, 모로코, 사냥 등이 있다. 그중 처음 보는 운보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여인의 누드다. 의자에 앉은 여인의 뒷모습을 수묵으로 표현했다. 과감한 생략이 돋보이지만, 비례와 균형에서 아쉬움이 있다. 이 그림을 보니 소원 문은희 화백에게 "누드는 네가 최고다"라고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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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 이상기


모로코를 여행하고 그린 모로코인의 모습도 이국적이다. 남성들은 모자를 쓰고, 여성들은 부르카를 입었다. 배경으로 성곽도시가 보이고, 당나귀와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1983년 작품이다. 또 하나 의미 있는 그림은 미당 서정주가 시를 쓰고, 운보 김기창이 그린 난(蘭)이다. 검은색으로 난을 치고, 연두색으로 꽃대를 표현하고, 갈색으로 꽃을 그렸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미당이 일흔 살에 시를 썼고, 갑자(甲子) 중추(仲秋)에 그렸다고 하니 1984년 가을이다. 시는 새벽녘 난초꽃 피는 순간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당 특유의 순수시다. 그렇지만 운보와 미당은 친일파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선지 그 소박과 순수가 조금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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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 ⓒ 이상기


이 고요에 묻은 나의 손때를
누군가 소리 없이 씻어 헤우고,
그 씻긴 자리 새로 벙그는
새벽 지샐녘 란초 한 송이.

-미당 서정주, 일흔 살에

우향과 운보 그리고 소원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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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와 우향 ⓒ 이상기


운보미술관 한쪽에는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실이 있다. 그곳에는 우향의 작품이 수십 점 전시되어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도 있지만, 새로운 조형실험을 한 작품이 더 많다. 일종의 추상 동양화다. 우향은 1970년 전후 미국에서 판화를 배웠고 1974년 판화전을 열기도 했다. 그녀는 또 서화에도 관심이 많아, 유명한 시에 그림을 그린 작품을 만들었다. 조지훈의 '고사(古寺)', 이상로의 '오후의 여운', 김후란의 '비연(飛鳶)' 등이 있다.

고사(古寺)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조름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시 조지훈
화 박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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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古寺) ⓒ 이상기


'고사'라는 시를 쓰고 목어를 그려넣었는데, 그 그림이 너무 인상적이다. 여백의 미도 돋보인다. 시서화가 정말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우향은 1976년 1월 미국 뉴욕 근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75년 10월 20일 운보가 우향을 간호하며 문은희 화백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이 구구절절하다. 주소는 뉴저지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되어 있으며, 편지 내용을 보니 딸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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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가 미국에서 문은희 화백에게 보낸 편지 ⓒ 이상기


"우향이 입원한 병원은 뉴욕에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위치에 있으며 훌륭한 시설을 갖춘 큰 종합병원이오. 입원비만 1일 100불(弗)이 되고 따로 치료비니 무엇이니 모두 지불해야 되는데 이곳 친구들이 내 그림 팔아 메꾸기로 되었어요. 어디 가나 좋은 친구들의 도움을 입게 되는구려.

지금 이곳은 만주(晩秋)요. 병원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넓은 수해(樹海)는 한창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소. 바람만 조금 불어도 수많은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휘날려 거리에 수북이 쌓이는구려.

그동안 우향의 병실에서 잔시중 들어주느라고 나 자신이 꼬치꼬치 말라가는 듯하고 나도 환자인가 착각이 되오. 여러 달 제대로 먹지 못해 몰골이 말씀 아니오만 투병정신은 의사들을 놀라게 하고 있소.

그의 병명은 확실치 않으나 암 계통이오. 지금 암 전문가들이 집중 치료를 하고 있으며 1개월 이내에 그 결과가 밝혀진다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소. 메말라 있는 우향의 곁에 온종일 같이 있고 보니 자꾸만 인생이 무엇인가, 예술은 어떻다는 것인가, 허무감이 드오. 병원에서 퇴원해도 장기치료를 요할 모양이오. 그래 퇴원하게 되면 워싱턴 딸아이 집으로 옮겨 놓고 계속 치료를 하기로..."
덧붙이는 글 운보 김기창 화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문은희 화백이다. 그것은 문 화백이 운보의 제자로, 평생 교류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문 화백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친필과 서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운보미술관의 작품, 문 화백과 나눈 필담과 편지를 토대로 운보의 삶과 예술을 정리했다. 문 화백은 운보 사후 운보미술관 운영에도 관심을 가졌고, 운보 제자들로 구성된 운사회의 중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 #예수의 생애 #우향 박래현 #소원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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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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