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 고택에 붙은 편액. '대우헌(大愚軒)'은 '크게 어리석다'는 뜻으로 경주 최씨들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김경준
고택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바로 '편액(현판)'입니다. 보통 주인 자신의 호(號)를 따서 붙이곤 하는 편액은 그 의미에 따라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경주 최씨 고택은 편액부터 남다릅니다. '대우헌(大愚軒: 크게 어리석은 집)', '둔차(鈍次:재주가 둔한 버금)'.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편액 대신 스스로 어리석고 둔하다고 낮춰 부르는 이름 뿐입니다.
각각 최준 선생의 조부인 최만희 선생과 부친인 최현식 선생의 호를 본땄다고 합니다. 만석꾼 집안의 후예였지만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어리석고 둔함을 호로 삼을 정도라니. 역시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명성이 거저 생긴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 최씨가의 재산이 영남대로 넘어간 까닭은현재 이 고택은 영남대학교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한겨레>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이 기사에 자세한 내막이 나오는데요. 이 사연은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대구대 설립자이자 이사장이었던 최준 선생에게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찾아와 "한수 이남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며 인수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이에 최준 선생은 "대학에는 주인이 없다"며 무상으로 양도하는 것은 물론 "상거래처럼 계약서를 써서도 안 된다"며 '구두 계약'의 형식으로 운영권을 삼성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뿐만 아니라 대구대 역시 박정희 정권에 헌납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납니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기존에 인수한 청구대와 대구대를 합병해 영남대를 출범시켰습니다. 경주 최씨 가문의 재산이 통째로 박정희 정권에 넘어간 것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최준 선생은 "왜 멋대로 박가(박정희)에게 파느냐"며 노발대발했지만 경주 최씨 가문은 이미 학교 운영권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경주 최씨 가문의 선산 등 경주 최씨가 대대로 축적한 재산은 지금도 모두 영남대 소유입니다. 고택 앞에 붙어있는 '이 고택은 학교법인 영남학원에서 소유하고 있다'는 문구가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