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e and> 책표지.
북하우스
지난날 '정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쓴 적이 있다. 이제는 이런 표현조차 뭔가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시시각각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정보 속에 살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선했던 정보가 빛바랜 정보가 되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한다.
장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명력이 짧은 책들도 그만큼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애지중지했던 책이 더 이상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는 책이 되고 마는 아쉬움도 종종 겪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노년에는 좀 적게 가지고 최대한 단출하게 살자. 그러자면 한 살 더 먹기 전에 덜 가지려는 실천과 정리하며 사는 습관도 필요 하겠다' 생각하게 됐다.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책이다. 그러니 책 정리는 언제나 정리 1순위가 되고 있다. 그런데 책이 어디 쉽게 정리되는 존재인가. 마음 뿐, 이런저런 이유와 계기로 여전히 늘어만 가고 있다.
여하간 예전처럼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소장하거나 하지 않는 등 나름 책을 덜어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외려 없는 책을 채워 가지고 있다가 노년에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시리즈가 있다.
2005년에 방송하기 시작해 2017년 7월 현재 1500회를 기록, 12주년이 된 'EBS-지식채널 e'를 바탕으로 한 '지식 e' 시리즈이다. 그래서 지난해(2017년) 11월 말, 신간목록에서 시리즈 10권 째로 출간된 <지식 e and>(북 하우스 펴냄)을 발견한 순간 설레기까지 했다.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시리즈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길 하는 것으로 10권 소식을 전해야겠다.
인간의 기억과, 기억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신화와 증오는 권력집단에 의해 조작된다. 이 조작은 시민들이 제노사이드 같은 잔학행위를 저지르게 하기 위한 것으로, '폭력은 인종을 정화한다', '민주주의를 구한다.', '사회를 보호한다.' 같은 숭고한 목적으로 정당화된다. '게르만의 우수한 혈통을 보존하겠다.'면서 자행된 쇼아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구성된 한 세대의 기억은 언어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 형성에 기여하는 한편, 혼란에 빠지거나 "조선인을 도랑으로 끌고 가 죽여라"와 같은 부도덕한 명령을 받았을 때 개인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세대를 이어 오는 이야기와 기억, 그 결과인 역사 해석은 현재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삶은 파괴될 수도, 새롭게 건설될 수도 있으며, 오랜 반목을 지속할 수도, 청산할 수도 있다.
강덕상(간토대지진 시 조선인학살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 모임)은 간토 학살이 "대형 재해 와중에 유언비어 때문에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서 "일제의 침략사와 조선의 저항사가 누적된 상황에서 일본 내 무고한 조선인을 상대로 일제가 벌인 전쟁이자, 국가권력의 조직적 학살"로 규정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지난 90년 동안 간토대지진 때 돌았던 유언비어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자국민에게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경계 대상'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고 진단하고, 험한 시위와 증오 발언이 횡행하는 지금이야말로 진상을 밝힐 적기라고 강조했다. - '십오엔 오십전'에서
1부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간토학살 이야기다. 2013년 6월, 일본에서 간토학살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 서명운동이 전개되는 등, 그동안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정확한 희생자 수를 비롯한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위한 활동이 계속되어 왔다. 물론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사료나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사과는커녕 과거에는 숨기기에 급급한 한편, 관동대지진에 폭도로 돌변한 조선인들 때문이라고 적반하장 변명하기 바빴고,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는커녕 세월만 더하며 여전히 묻히거나 소멸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알려진 간토학살 당시 희생된 조선인은 6661명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책에 의하면 3.4배에 해당하는 2만3058명이라고 한다. 또한 책은 당시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으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 학살을 할 정도로 과격한 유언비어가 만들어지고 확산됐는지 등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려준다.
그동안 '지식 e' 시리즈들을 읽으며 자주 느끼곤 했던 것 중 하나는 같은 사건, 같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다른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간토학살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이제까지 어떤 책을 통해서도 읽지 못했던 것들을 들려주고 있어서 누군가에게 의견을 더해 들려줄 정도로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피해자인 우리에게도 간토학살은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여러 만행들에 비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읽은 간토학살에 대한 이야기 '십오엔 오십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부탁드리고 싶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