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많아 좋겠다"는 소개팅남, 무슨 의미일까

'여자다움'과 '남자다움'... 고정관념에 작별을 고하고 싶다

등록 2018.03.30 21:03수정 2018.03.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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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해~ 지금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렴."


주변에 귀여운 아이라곤 조카밖에 없는, '조카 바보'인 나는 둘째 조카의 생일선물로 예쁜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를 준비했다.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어릴 적 나는 레이스에 목숨을 걸었고 분홍색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것 같다. 앨범을 들춰보면 어딘가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은 걸 보면.

둘째 조카의 선물을 고르며 첫째 조카의 선물도 같이 샀다. 딱 어울리겠다 싶은 남색의 야구 점퍼였는데... 선물을 받아본 조카가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는 '나도 핑크 핑크~ 피이잉크!' 하며 엎드려 절이라도 하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방바닥을 구른다.

유독 핑크, 분홍색을 좋아하는 남자아이. 그러고 보니 '남자는 핑크지~'하며 분홍색 모자를 골랐던 조카의 모습이 떠오른다. 생애 처음 가져본 아이의 취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고모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다섯 살 남자 조카는 분홍색을 좋아하고, 세 살 여자 조카는 긴 머리에 늘씬한 바비 인형 대신 조립 로봇을 갖고 논다. 그즈음의 나는 '미미'와 '쥬쥬' 같은 여자 인형을 갖고 놀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나 사뭇 다르다.

촌스러운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고정관념이 고정관념인 줄 모르고 편견이 편견인 줄 모르고 자랐던 고모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그런 식의 사고를 주입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자아이의 방을 분홍색으로 도배하고, 남자아이의 방을 파란색으로 도배하는 보통의, 여느 어른들처럼.


'여자다움'과 '남자다움', 누가 정의한 걸까

a  그러고 보니 '남자는 핑크지~'하며 분홍색 모자를 골랐던 조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핑크지~'하며 분홍색 모자를 골랐던 조카의 모습이 떠오른다. ⓒ unsplash


아이들은 자라면서 끊임없이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에 대해 들을 것이다. 사실, '그게 뭔데요?'라고 물으면 여전히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애초에 질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런 연유로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도 답을 구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 전부를 통틀어 나는 어떤 '구분' 속에서 나를 '부정'해 왔고 또 '긍정'해 왔을까?


누군가는 '왜 이렇게 유난이야', '뭐가 불만인데?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굴어'라고 할지 모르겠고, '너도 페미니스트냐?'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다. 당최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도 사실 영영 모르겠지만.
     
최근엔 이런 일도 있었다. 소개팅 상대가 첫 인사를 마치자마자, '되게 여성스러우시네요'라는 얘길 한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꼈을까? 몇 마디 인사가 오갔을 뿐인데. 말투가 그랬나? 어떤 몸짓이나 손짓이 그랬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 긴 머리가, 아니면 귀걸이와 반지가, 무릎까지 내려온 치마가, 혹은 높은 구두가 나를 여성스럽게 보이게 했을까? 그저 개인의 취향이었을 뿐이다. 물론, 칭찬인 거 같으니 고맙게 들었지만 여자에게 건네는 여성스럽다는 말은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가 바라는 여자, 여자가 바라는 남자. 어쩌면 여성스럽다는 말은 남자가 바라는 여자의 모습은 아닐까. 왠지 그 말 속엔 '종속'되기 쉬운 뉘앙스가 있다. 이성에게 '되게 남성스러우시네요'라든지 '남자답다'는 말을 꺼내 보지 않은 걸 보면, 적어도 내가 바라는 남자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닌가 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눈물이 많은 편이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 답하니, '좋겠다'고 한다. 남자는 우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왜 울면 안 되느냐? 울어도 된다'라고 하니 '그게 좀 그렇다'는 말을 한다. '그게'라는 말 속에, '좀'이라는 약간의 말 속에, '그렇다'는 말에... 도대체 이 세 음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걸까. 남자라고 감정이 없을 리 없고, 울면 좀 어떻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 당신 앞에서 운 남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 되묻는다. '어? 그렇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내 앞에서 운 남자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눈물이 나지 않았던 걸까, 애써 울음을 삼켰던 걸까, 아니면 보통의 많은 날 머쓱한 웃음이나 마른기침으로 대신했던 걸까. 그러고 보면 '남자다움'이란 게, 여러 남자를 속으로 울게 했던 건 아닐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그런 이중 잣대에 질려버리는 요즘. 남녀를 구분하는 고정관념에 정중하게 '안녕'을 고하고 싶다. 스스로를 억압하던 고약한 사고와 배고픈 사유에 뒤늦게 미안함을 전하면서.
#남자다움 #여자다움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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