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꾼 된 교사, 송산리 고분군의 비극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백제역사문화 편] 공주 송산리 고분군

등록 2018.03.30 13:59수정 2018.03.3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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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백제는 도읍 가까이에 왕릉을 조성했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성 인근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왕릉으로 주목을 받아왔고, 실제 무령왕릉의 발굴로 웅진 시기의 왕릉인 것이 입증이 되었다. 63년간 웅진 시기의 도읍이었던 공산성과 함께 공주를 대표하는 백제유적지 중 한 곳인 송산리 고분군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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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고분군 웅진시기의 백제 왕릉, 송산리 고분군 ⓒ 김희태


참고로 웅진 시기의 백제왕은 모두 다섯 명으로 도읍을 옮겼던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과 무령왕, 성왕 등이다. 이 가운데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은 모두 제 명에 죽지 못하고 신하들에 의해 피살을 당했다. 당시 백제의 왕실과 지방 세력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비극, 가루베 지온의 도굴

송산리 고분군은 총 7기의 고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제일 위의 1호분에서 4호분은 일렬로 정렬이 되어 있고, 아래쪽에 서로 다른 묘제 양식을 한 3기의 고분이 밀집된 형태다. 위에 정렬된 1~4호분과 가장 아래쪽에 있는 5호분의 묘제 양식은 석실분으로 확인이 되었으며, 5호분의 경우 '궁륭형'으로 천장이 좁아지는 형태다. 6호분의 경우 이전과 달리 벽돌무덤(전축분) 양식이 나타나는데, 이 같은 묘제 양식은 중국의 남조 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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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벽돌 무령왕릉에 새겨진 벽돌의 명문을 통해 중국 양나라와의 교류를 알 수 있다. 사진 : 국립공주박물관 직접 촬영 ⓒ 김희태


실제로 무령왕릉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벽돌의 명문에서 양나라의 묘제 양식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당시 백제와 남조 국가들 사이에 물적, 인적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6호분에서 백제 고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벽화가 확인되는데, 사신도가 그려진 것도 주목해볼 만하다. 한편 6호분과 동일한 묘제 양식인 7호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령왕릉'이다.

애석하게도 송산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당시 공주 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가루베 지온'에 의해 1927년부터 차례로 도굴을 당했다. 명색이 교육자라는 인간이 도굴꾼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벌였으니, 송산리 고분군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가루베 지온이 5호분과 6호분을 도굴하면서, 더 이상의 고분은 없다고 판단을 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판단으로 무령왕릉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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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6호분 송산리 6호분, 백제 고분으로 드물게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동성왕 혹은 무령왕의 왕비의 능으로 추정된다. ⓒ 김희태


사실 지금이야 무령왕릉의 봉분을 만들었지만, 발견될 당시만 해도 이곳에 고분이 있는지 아무도 인지를 못했다. 따라서 가루베 지온의 오판은 우리에게 있어 천운이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송산리 고분군의 연대를 추정할 때 묘지석을 통해 연대가 확실한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6호분의 경우 무령왕보다 이른 동성왕 혹은 무령왕의 왕비로 추정이 된다. 일부에서 성왕의 고분으로 보고 있지만, 성왕은 사비시대를 열었던 왕으로 능산리 고분군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능산리 고분군의 '중하총'을 성왕의 능으로 보기도 한다.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한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무령왕릉이 위치한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에 가면 한 번씩 들르는 곳인데, 이제까지 수차례 방문하면서도, 유독 송산리 고분군의 정상 부분에 위치한 '방단계단형 적석유구'를 주목한 적은 없었다. 특이한 건 발굴조사 결과 계단 형태의 제단 모양을 하고 있으며, 별도의 목관이나 장사를 지낸 흔적은 확인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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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단계단형 적석유구 송산리 고분군의 가장 위쪽에 있는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개로왕의 가묘 혹은 제단으로 추정된다. ⓒ 김희태


그럼에도 내부에서 삼족토기를 비롯해 백제 토기와 옹관 편이 수습이 되었는데, 일부에서 시신이 없는 가묘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만약 이것이 가묘라면 도대체 누구의 가묘일까? 가묘라는 전제를 두고 본다면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문주왕의 아버지인 '개로왕'이다.

개로왕은 장수왕의 남진으로 인한 여파로, 결국 사로잡혀 아단성에서 피살되었다. 때문에 당시 개로왕의 시신을 수습되지 못했고, 이후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를 하면서 개로왕의 가묘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반면 계단 형태의 제단 모양에 주목해서 이곳을 제사시설로 봐야 한다는 주장 역시 만만치가 않은데, 아직까지 명확하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이유로 안내문에서도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적시하고 있다.

물론 개로왕의 가묘보다 제단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느 정도 개로왕과의 연관성은 있어 보이는 만큼 송산리 고분군을 방문할 때 관심 있게 지켜보면 좋은 역사의 현장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포스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백제역사문화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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