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장소 놀이터, 우습게 보지 마세요

[매일 육아하며 배웁니다 9] 날 것 그대로의 인간 관계를 마주하는 곳

등록 2018.04.09 15:19수정 2018.04.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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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 어른들끼리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일들을 겪습니다. 오직 육아하는 이때만, 부딪칠 수 있습니다. 애 키우는 동안 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좌절감에 글을 씁니다. '너희만 크냐? 엄마도 같이 크자'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육아일상 속 메시지를 담아 글을 씁니다. [편집자말]
"혼자 할 거야."


어린이집 하원 후, 놀이터에 가던 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딸은 아직 말이 서툴다. 제대로 알아듣고 싶어 조금 더 캐물었다.

"뭐를 혼자 할 거야?"
"모래 놀이."

그제야 이해됐다. 아이는 어린이집 하원 즈음인, 오후 놀이터 터줏대감이다. 놀이터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놀이를 섭렵했는데, 그중 으뜸은 단연 모래놀이였다. 선명한 핑크빛 모래놀이 장난감을 풀어 놓으면 갓 걷기 시작한 돌쟁이에서부터, 초등학생들까지 우르르 몰려온다. 아이들은 모두 모래 장난을 좋아했다. 어제도, 그제도 낯선 아이들과 장난감을 나누어 놀더니, 그게 싫었나보다.

"같이 놀면 더 재밌을 텐데."
"싫어."

단호한 한 마디. 함께 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는 바야흐로 31개월. '내 것'을 챙기는 소유개념과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인지발달 중인 딸에게, 배려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없다. 어른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조언만 해주고, 혼자 놀지, 함께 놀지 선택을 딸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래. 같이 놀지 말지를 너가 결정해. 대신 나눠 놀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이 싫어 할 수도 있어."

딸은 대꾸도 안 하고, 도착하자마자 모래놀이 장난감부터 풀었다. 흙 파고, 밀고, 담고, 찍고, 꽂고. 온갖 화려한 기술을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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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의 즐거움 중 으뜸은 모래놀이. 장난감을 풀어 놓으면, 낯선 친구들이 찾아온다. ⓒ 최다혜


몰입해서 노는 딸 옆으로 한 살 어린 남자 아이가 다가왔다. 올 것이 왔다. 딸이 같이 놀기를 거부하면, 저 아이는 얼마나 서러울까. 보기 민망한 상황이 눈 앞에 훤했다. 남자 아이의 엄마 얼굴에도 안절부절, 긴장한 빛이 돌았다. 아들이 타인의 장난감에 허락없이 함부로 손 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

"동생아, 같이 놀자."

다행이었다! 혼자 놀 거라더니, 막상 어린 친구가 쭈뼛쭈뼛 다가오자 마음을 돌렸나보다. 딸은 이름모를 동생과 어울려 놀기로 했다. 나와 아이 엄마는 긴장이 풀려 그제서야 서로 인사를 나눴다. 함께 놀 줄 모르는 3살, 4살 아이는, 따로 놀았다. 각자의 상상 세계에서 행복해하면서!

쪼잔한 엄마, 부끄러워졌다

한창 잘 놀던 모래놀이 장난감을 바닥에 팽개치고, 미련없이 뛰어갔다. 사실, 아무리 좋아하는 놀이라도 길어야 10분이다. 모래놀이가 지겨워, 놀이기구를 타러 간 것이다. 시소, 그네, 미끄럼틀. 하나씩 만끽하며 즐거워한다. 유모차에서 바둥대는 7개월 둘째와 함께 멀찍이서, 혼자 잘 노는 놀이터 장인을 지켜만 보았다.

미끄럼틀에서 주르르 내려오더니, 뱅뱅이로 뛰어갔다. 자매로 보이는 여아 셋이 빠르게 돌리는 뱅뱅이에 눈길이 간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뱅뱅이는 2개였는데, 딸이 동승하면, 세 아이가 다른 뱅뱅이로 우르르 바꿔 타는 게 아닌가. 한두 번 거절도 아니고, 민망한 상황을 다섯 번 넘게 반복했다. 딸이 어떻게 하나 궁금했다. 계속 소외되니, 속상한 마음에 그만 둘 줄 알았다.

자식은 부모 마음 같지 않았다. 자존심 구겨가며 언니들을 쫓아다녔다. 저 정도로 비굴하면, 같이 타 줄 만도 하건만. 눈치 없는 딸이 거절당하기만 하니 지켜 볼 수만 없었다.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너랑 안 탄대. 같이 놀지마. 엄마랑 놀자."
"싫어. 이거 탈 거야. 같이 탈 거야."

도무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세 여자 아이들은 난처해 하면서도, 낯선 꼬마 때문에 놀이기구를 탈 수가 없었다. 자매는 간간이 인상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할 수 없다. 어른의 권력을 이용해, 조금 비굴하게 부탁했다.

"얘들아, 딱 한 번만 같이 타주면 안 될까?"

아이들은 서로 눈짓 하더니, 드디어 4살 꼬마를 태워줬다.

"아, 애기 있으니 세게 못 돌려. 재미 없어."

저렇게 드러내고 싫어하니, 더 이상 함께 탈 수 없었다. 딸을 무엇으로 꼬드겨 뱅뱅이에서 내리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다행히 어린이집 친구가 왔다! 이때다 싶어 친구와 함께 태우고, 세 자매는 다시 속도감 있는 뱅뱅이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마음이 복잡했다. 딸이 혼자 모래놀이 하겠다 했을 때는 '그래. 같이 할지, 혼자 할지, 선택은 네 몫이다. 정답은 없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른 아이들이 딸과 놀고 싶어하지 않을 때는 '어휴, 같이 놀아주면 좀 좋아. 놀이터는 어울려 노는 곳'이라고 완전히 반대 입장을 취해버렸다.

내 좁은 심보를 알아차리니, 부끄러웠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놀이터 버전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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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는 낯선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사회 학습의 공간이다.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 pixabay


부모들이여, 놀이터로 갑시다!

짧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놀이터에 오지 않았다면 생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아이만 놀이터에서 낯선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았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내 아이만 보면 됐고,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 지도 아래, 조화롭게 잘 지냈다. 육아 서적에서 가르쳐주는 교우 관계는 책 밖에서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자녀가 타인과 어울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려면, 부모도 난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실전 경험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최적의 장소가 바로 놀이터였다.

놀이터에 오면 처음 본 아이, 얼굴 마주쳤던 아이, 원래 친한 친구도 만날 수 있다. 동생, 또래, 언니, 오빠(누나, 형) 등 연령대도 다양하다. 성향도 가지각색이다. 모르는 친구와도 잘 어울리는 아이, 동생들을 챙기며 뿌듯해 하는 초등학생들, 낯선이를 경계하는 아이들. 좋고, 나쁨 없이 그저 다른 아이들이 어우러진다.

아이도, 부모도 놀이터에서 여러가지 상황을 겪어보면 좋겠다. 그때, 그때 다를 것이다. 날 것 그대로, 인간 관계 속으로 들어가니 매번 다른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대처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은 아이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딸이 놀이터에 갈 때 장난감을 넉넉히 챙겨가야겠다. 혼자 놀지, 말지는 딸의 선택이지만, 상대 아이가 거절당했을 때 느낄 민망함을 부모가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터에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나만의 비결이 생겼다. 볕 좋은 날, 자주 나가 '원만한 또래 관계 비법'을 쌓아야겠다. 놀이터에 갑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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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부모도 함께 크는 놀이터. ⓒ pixabay


덧붙이는 글 이 글을 기자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하였습니다.
#놀이터에가야하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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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글 쓰고, 사랑합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 꿉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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