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애가 왜 이렇게 운동을 못 하냐"고?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①] 성별이분법을 넘어선 스포츠를 바라며, 트랜스젠더 여성의 목소리

등록 2018.04.16 08:38수정 2018.04.1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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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018 퀴어여성게임즈(2018 Queer Women Games)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가 개최된다. 2017년 동대문구체육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성소수자 행사라는 이유로 동대문구가 대관을 취소하여 한 차례 연기되었던 자리이다. 퀴어여성네트워크는 퀴어여성게임즈를 개최하면서 다양한 여성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여성성소수자에게 있어 스포츠는 어떤 의미인가, 스포츠에 있어 성평등과 성소수자 인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기자말

 당시 수행평가 과제였던 '레이업슛'을 나는 좀처럼 하지를 못했다.
당시 수행평가 과제였던 '레이업슛'을 나는 좀처럼 하지를 못했다. pixabay

"너 OO이한테 빵 하나 사주고 좀 배워라"

고등학교 체육시간 농구수업 때의 일이다. 당시 수행평가 과제였던 '레이업슛'을 나는 좀처럼 하지를 못했다. 체육교사는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수업을 마치고 반 아이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저렇게 말했다. 수업으론 안 되니 운동을 잘하는 OO이한테 따로 배우라는 이야기였다.

교사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보며 웃는 반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수치심은 지금도 기억에 있다. 나는 결국 수행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았고, 그 뒤로 농구공을 잡지 않았다.

남자애가 왜 이렇게 운동을 못해

어릴 때는 운동을 그다지 싫어했던 거 같지는 않다.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책보고 만화 보는 것을 더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동네 아이들과 가끔 어울려 자전거를 타거나 야구를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실력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같이 어울려 노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면서 운동은 '성적', '남성성', '여성성'과 결부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체육은 즐기는 것이 아닌 성적을 받기 위해, (지정 성별) 남자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 되었고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그렇게 운동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게 되면서 주변으로부터 "남자가 왜 이렇게 운동을 못 하냐", "남자가 왜 이렇게 허약하냐"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체육활동이 남성성과 결부한 것이다. 남자는 당연히 체력이 좋고, 운동을 좋아하며, 잘할 것이라는 성별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남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러한 고정관념들은 구체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타박받는 것을 넘어서, 앞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공개적인 무시를 당하거나 체육활동 전반에서 소외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동시에 주위의 성별 고정관념을 내면화면서 이것이 오히려 운동을 적극적으로 피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중학교 무렵부터 주변의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나를 트랜스젠더로서 조금씩 정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별정체성을 탐색해가는 나에게 있어 체육활동은 남성성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기피해야 할 무언가로 느껴졌다.

즉, '나는 남성의 성별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자기 인식과, '체육활동은 곧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이 합쳐진 결과 '나는 체육활동을 열심히 하면 안 된다'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중고교 시설의 체육시간은 나에게는 썩 좋지 않은 기억들만을 안겨 주었다.


'남성적인 몸'을 만들기 위한 노력

그러던 내가 운동을 자발적으로 하게 된 것은 대학생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시 나는 여성으로서의 성별정체성이 어느 정도 확고했음에도, 트랜지션과 커밍아웃을 했을 때 맞닥뜨릴 차별과 혐오를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 결과 나는 20대 초반, 나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억압하고 그냥 '남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의 나의 막연한 생각은 이랬다. '만일 운동을 통해 '남성적인 몸'을 만든다면 평범한 남자로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역시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몸은 남성적인 몸'이고 '남성적인 몸을 하면 내면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잘못된 결론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약 1년간 체육관을 다니며 근력 운동에 매진했다.

 스포츠와 성별이분법을 둘러싼 고정관념은 나를 조여왔다.
스포츠와 성별이분법을 둘러싼 고정관념은 나를 조여왔다. pixabay

그러나 이를 통해 나의 여성으로서의 성별정체성이 억압되거나 고민 없이 남자로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육상 금메달리스트로서 성전환을 한 '케이틀린 제너'나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고 세계역도선수권 은메달을 획득한 '로렐 허버드'를 봐도 알 수 있듯, 운동을 하는 것과 성별정체성은 무관하다.

또한 근력 운동을 통해 단련된 신체가 곧 남성의 신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결국 1년간의 운동을 통해 얻은 결과는 좋아진 체력과 턱걸이를 5개 할 수 있다는 뿌듯함이었지, 정체성 고민에서의 해방은 아니었다.

퀴어여성게임즈를 준비하며

2014년부터 나는 비로소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여성으로 트랜지션과 커밍아웃을 했다. 동시에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면서 퀴어여성네트워크(아래 '퀴여네')에 참여하였다. 퀴여네는 여성성소수자를 가시화하고 성평등과 성소수자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모임이다. 2015년부터 참여한 퀴여네 활동은 세상의 성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떨쳐버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실 작년 퀴여네 활동으로 체육대회를 준비하게 되었을 때 내가 참여해도 되는지 망설였다. 앞서 보았듯 나한테 체육활동은 남성성을 부정하기 위해, 또는 반대로 내 성별정체성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순수하게 이를 즐긴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퀴어여성게임즈 홍보영상을 만들기 위해 십수 년만에 농구공을 잡아 보며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기획단과 함께 웃고 즐기며 여러 운동을 하던 그 자리에는 어떠한 몸이 어떠한 움직임이 여성적인지, 남성적인지에 대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어울리는 개인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는 과거 학창시절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었다. 만일 그 당시 체육활동을 하는 것이 남성성과 결부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누군가 나에게 고정된 남성의 몸/여성의 몸, 남자가 하는 운동/여자가 하는 운동은 없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면 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탐색하면서 그와는 별개로 운동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를 통해 스스로의 신체를 움직이고 타인과 교류하는 즐거움을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지 않았을까?

 2018. 3. 망원유수지 체육공원에서
2018. 3. 망원유수지 체육공원에서퀴어여성네트워크

물론 가정이기에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현재 트랜지션을 하고 커밍아웃을 한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주말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등산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에게 이러한 운동들은 단지 체력을 기르고 즐기기 위한 활동일 뿐, 더 이상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고민 지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처럼 스포츠와 성별이분법을 둘러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를 변화시켜 자유롭게 나의 몸과 마주하고, 이를 움직여보며 자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퀴어여성게임즈는 이러한 변화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성소수자 #퀴어여성 #체육대회 #성별이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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