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을 농담으로 쓰지 말자는 주장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김민준
앞서 말했듯 2016년 '병신' 논쟁은 관심 있을 법한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뜨거운 감자'였는데, 턴투에이블 내부에서도 이 문제가 큰 화두로 떠올랐던 모양이다.
포털과 SNS에서는 병신년 농담이 우수수 쏟아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척 센스 있는 언어유희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병신년 소재 농담 NO 캠페인 같은 것도 벌어지던데 나는 좀체 입장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하기야 면전에서 '장애인'이라는 말을 욕으로 들을 때조차 아무 말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여는 글- 병신육갑' 중)
'병신'을 농담으로 쓰지 말자는 주장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장애인을 앞에 두고 '병신아!'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욕이 담고 있는 함의가 '모자라 보이는 신체적 기능'을 조롱하고자 함에 있는 만큼 '병신'은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쓰지 말자는 비장애인의 주장은 가끔, 그것을 쓰고 있는 장애인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당신은 병신이란 말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예컨대 뇌경색으로 손이 굳고 걸음걸이가 둔해진 나의 할매는 병신이 되었다고 슬퍼하던데요. 이런 용례를 보면 병신의 어원에는 분명 장애인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중략) 이를테면 이런 마음인 것입니다. 병신을 철폐하자는 주장이야말로 멀어지고 있던 장애인과 병신을 도로 결부 지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여는 글- 병신육갑' 중)
결국 '병신'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함의는 논쟁적이다.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은 쓰자, 쓰지 말자, 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얘기지만 언어 사용의 문제에 있어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병신이라는 단어의 사용 여부 이전에, 병신이 당사자와 비당사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좀 더 분석적인 고찰일 것이다.
문집 <병신육갑>에서는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병신은 장애혐오 표현이니까 쓰지 맙시다'가 아니라, '병신이라는 표현에 대해 터놓고 논쟁해 봅시다'의 태도를 취한다. 실제로 턴투에이블이 이 문집을 엮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환자'와 '병신'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세상은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언젠가는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면 환자, 신체적 기능이 아예 고장나버리면 병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라고 필진 몽탕은 말한다.
그 고장에 머무르던 일 년간 사람들은 내가 다시 건강해져서 학교에 다니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부모님과 통화하면 자연스레 복학 이야기가 나왔고 친지들은 찾아와 앞으로의 사회생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태도는 한편으로 고마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계속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다시 건강해지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겠지?" (중략) 환자로 있는 한 나는 안전했다. 그러나 병신은 그렇지 못했다. (몽탕, '환자와 병신 사이' 중)
"아직까지 우린 이 얘기를 제대로 해보지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