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 2. 7.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 날아와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첫 교전은 10월 하순에 치러졌다. 미국은 그때까지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여겼다. 세계 최강인 자신들에게 중국이 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우습게 여겼다. 특히 맥아더는 중국군을 아주 형편없이 얕보며, 설사 중국이 참전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자 최후 대공세로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은 11월 초 한만국경 폭격으로 시작했다. 미군 B-29 폭격기는 2주 동안 북한 대부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러자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했다. 11월 하순, 맥아더는 유엔군 총병력 42만 명에게 크리스마스 총공격을 명령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그대들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 11월 25일부터 마침내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이 시작됐다. 당초 유엔군은 자신만만했으나 중국군의 고전적인 공세와 벼랑 끝 전술로 나온 인민군의 거센 반격에 당황했다. 중국군은 뜻밖의 장소에서 밤낮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불쑥불쑥 전투장에 나타나는 전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에 유엔군 병사들은 중국군의 고전적인 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특히 그들은 중국군의 야간 공격 공포감에 질려 밤이 오는 게 두려웠다.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게다가 날씨조차도 유엔군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파병된 유엔군에게 영하 30~40℃를 오르내리는 북부지방의 강추위는 적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이런 혹한 속에 유엔군은 중국군 참전 이후 2주일 동안 약 250km나 계속 후퇴했다.
한국전쟁 전세는 또다시 대역전을 거듭했다. 1950년 11월 말, 인민군과 중국군 연합 공산군은 청천강과 장진호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까지 진출했고, 12월 6일에는 마침내 평양을 탈환했다. 맥아더는 마침내 중국군의 맹공과 강추위로 흥남 철수명령을 내렸다.
1950년 12월 25일, 공산군은 38선 이북의 거의 전 지역을 다시 장악해 맥아더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공산군은 12월 31일 밤 모든 전선에서 다시 38선을 돌파한 뒤 남하했다. 1951년 1월 4일 공산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했고, 1월 중순에는 37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총공세가 대참패로 돌아가자 경악했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작전은 가장 기본인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무시한 졸전으로 패전을 자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