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매카시
위키커먼즈
70년 전의 사상검증"여기 제 손에 공산당 지령을 받는 공무원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1950년 2월 6일, 웨스트 버지니아 주 휠링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외쳤다. 조지프 매카시, 위스콘신 주 판사 출신으로 공화당 상원의원이 된 그는,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성실함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어떤 무리수를 써서라도 대중의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 났던 무명 정치인이었다.
그의 공산당 발언 역시 관심받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고, 조금만 생각해도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쉽사리 드러날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매카시의 발언은 AP통신을 통해 미국 전역의 언론사에 전달되었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그의 발언을 지나쳤다.
그럼에도 매카시는 주목받는 데 성공했다. 기자들이 사실 여부를 추궁하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 애당초 매카시에겐 명단 따윈 있지도 않았다. 그저 위스키 한 병만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파견된 기자들에겐 발언을 검증할 시간 여유는 없었고, 그렇다고 매카시의 소지품을 뒤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카시는 그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기자들은 몰려올 것이고, 기자들이 자신의 발언을 기사화할 것도 알아챈 것이다. 매카시의 분석은 정확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늘어놓음에도 매카시의 이름은 안보 투사로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차례 일간 신문의 1면을 차지한 매카시는 어느새 미국의 공화당 우파 진영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매카시가 힘을 얻은 것은 당시 시대상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경험한 미국인들은 미국 사회의 이상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한 축에는 소련이 있었고, 소련은 전 세계의 공산세력을 지원하며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트루먼 대통령의 민주당 정권은 그런 위협에 안일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앨저 히스와 오웬 레티모어 같은, 민주당의 진보 진영 인사들이 간첩 혐의로 기소됐고,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미국인들이 공산세력을 두려워하기에는 충분했다. 매카시는 이런 시류에 영합했을 뿐이었다. 훗날 매카시즘이라 불리게 되는 미국 현대사의 손꼽히는 비극에는 그런 이면이 있었다.
전당대회 발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카시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 활동에 참여한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1938년, 미국의 공화당 내 보수 우파 국회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기관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진보성향의 교육자, 법조인, 사회운동가들의 사상을 검증하는 것이었는데, 미국 내 진보 좌파들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미국 사회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그중에서도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었다. 문화예술계 특성상 영화인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진보적인 분위기였고 노조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공산주의 역시 사상의 자유에 의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이 청문회에 소환됐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거나 공산당에 가입한 이들과 친분관계가 있는 것이 이유였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그들을 심판할 권리는 없었다. 공산당 가입은 엄연한 합법이었고, 민주주의 국가는 시민의 합법적인 행위를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언을 거부한 이들은 의회 모독죄가 적용되어 처벌을 받았다.
처벌 근거야 어쨌든,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된 영화인들은 업계 내 명성을 막론하고 일개 노동자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선택은 없었다. 국회에 불려 온 이들은 국민의 대표들이 보는 한가운데서 자신의 사상을 고백당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매카시의 위원회 가담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에게 있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매카시가 위원회에 가담한 뒤인 1951년, 할리우드의 영화인들은 또다시 탄압을 받는다. 이제 공산당 가입 전력 정도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공산당을 확실하게 반대하지 않고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지지하지 않는 것 역시 사상검증의 이유가 됐다. 우익 정치인들의 조직적 탄압과 대중들의 분노 속에서 영화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었다. 소신을 선택하여 비애국민이 되거나, 청문회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며 동료 영화인을 고발하는 것 외엔.
월트 디즈니와 MGM의 로버트 M. 메이어 사장 같은 할리우드의 자본가들 역시 사상검증의 대상이었다. 할리우드에 좌파가 창궐한 것에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문회에 소환된 자본가들은 도리어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적극 협조했다. 매카시즘은 하나의 기회였다.
자본가 입장에서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노동자는 눈엣가시였고 이들을 대놓고 쫓아내기에 사상 검증 문제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다. 더군다나 로널드 레이건 같은 보수 우파 배우들과 -먼 훗날 후배 영화인들의 야유 속에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받은- 엘리야 카잔 같은 변절자들이 동료들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으니, 자본가들이 노동탄압에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인들은 할리우드에서 추방당했다.
찰리 채플린은 스위스로 이주해 말년에야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에 정착한 브레히트 베르톨트는 매카시즘을 피해 미국을 떠나야만 했다. 존 휴스턴과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햅번과 같은 영화인들이 헌법에 의거해 핍박받는 동료들을 위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들 역시 매카시즘에 호응하는 대중들에 의해 활동 취소 압박을 받는 등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할리우드의 흑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