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비각과 파비각 복원된 황산대첩비는 황산대첩비각에 세워져 있고, 파괴된 파편들은 파비각에 보관하고 있다.
홍윤호
이후에도 왜구는 여러 번 고려를 공격했지만, 이같이 대규모의 선단을 구성해서 내륙까지 휘젓고 다니는 사례는 이제 다시는 없었다. 그만큼 고려의 대응력과 전투력이 강화된 부분도 있다. 게다가 이후 왜구는 가까운 고려를 벗어나 훨씬 거리가 먼 중국 서남부 해안과 동남아시아까지 본격적으로 약탈전을 다니게 된다.
고려 말 이 땅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전시 상태로 몰아넣은 왜구가 단순한 왜구일 수는 없다. 이들 왜구는 1350년경부터 70~80년 간 우리 땅은 물론 중국 서남부 해안,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까지 침공해서 이 지역의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인력과 군대, 물자가 조직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 이 정도의 폭력 사태를 해적질로만 볼 수는 없다.
전쟁사가 임용한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휩쓴 이 폭력적인 왜구의 질주는 일본 사회의 내적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일찍부터 봉건 사회로 쪼개져 외부적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분열이 경쟁을 낳고, 지방세력 간의 생존 경쟁이 농업과 상업,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지방세력들만으로 침략군을 편성하고 전쟁을 수행할 만한 인원과 물자를 조달할 수 있을 정도가 된 데다 이들의 욕구를 통제할 만한 중앙 권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출현한 것이 왜구였다는 말이다.
고려는 갑자기 남쪽에서 나타난 이 강적에 대응하여 왜구를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화포를 개발하고 해상 전술을 마련하여 수군을 발전시키게 된다.
조선 초기에 이미 다양한 무기와 화포를 개발, 개량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와 감시의 눈길을 유지하며 때때로 쓰시마섬을 공략한 것은 조선 스스로가 일본을 위험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아마 분열된 일본의 통일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남북한의 통일을 원치 않듯.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고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대등하게 맞서 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200년 전 고려 말에 치열하게 싸우고 그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대응 무기와 기술, 그리고 전술을 발전시킨 것이 그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크게는 두 조각, 그리고 여러 개의 파편들로 쪼개진 황산대첩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증명하는 유물이지만, 이러한 파괴를 허용했던 외세의 지배체제가 이 땅에 다시는 들어서지 말아야 할 증거물도 된다.
분노하기보다는 기억하자. 감정보다는 차분한 이성이 필요하다. 한반도 주변에 만만한 상대는 그 누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