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피바위'... 왜구의 핏자국보다 중요한 진실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9]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황산대첩비

등록 2018.05.13 20:03수정 2018.05.1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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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 1945년 일제가 저지른 만행으로 조각난 비석. 현재 황산대첩비지 파비각 속에 보전하고 있다.
황산대첩비1945년 일제가 저지른 만행으로 조각난 비석. 현재 황산대첩비지 파비각 속에 보전하고 있다. 홍윤호

이성계와 왜군 소년 장수의 대결

1380년 가을,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산중 분지에 왜구가 집결했다. 운봉에서 인월로 통하는 작은 하천인 람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황산(698m)과 593봉 두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우뚝 서 있었다. 운봉에서 인월로 통하는 이 좁은 길목과 산 위에 왜구가 포진했다.


이성계를 사령관으로 한 고려군은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이 좁은 통로로 다가서고 있었다. 왜구는 지형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미리 확보하고 고려군을 기다렸다. 오후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즈음 이성계는 결단을 내리고 왜구가 포진한 양쪽 산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왜구를 몰아붙여 남쪽 산간에 집결시킨 고려군은 희생을 각오하고 왜구와 정면대결을 벌인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나름의 편제를 갖추고 나름의 전술로 고려군을 괴롭혔고, 혼전 중에 사령관 이성계를 집중 공격하여 이성계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또 이성계의 뒤에서 접근하는 왜구를 의형제 이두란이 화살로 쏘아 맞혀 이성계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악전고투였다. 사방을 포위하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왜구는 결국 이성계의 활솜씨에 8명이 쓰러지고 나서야 공격을 중단했다.

고려군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이대로 싸움을 멈추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장기적인 대치 상태로 갈 가능성이 컸다.

이때 이성계가 칼을 빼들고 앞 선에서 맹렬하게 돌진, 다시 적군을 몰아붙이자 이번에는 왜구가 위기에 빠졌다. 분노한 왜구 장수 한 명이 튀어나왔다. 왜구의 연합군을 이끈 소년 장수, 아기바투(한자어로는 아지발도 阿只拔都)였다. 15~6세 정도로 나이는 어리지만 신분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장수는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격전을 벌였고, 고려군은 그 기세에 눌려 금세 허물어졌다.

그의 용맹에 이성계도 감탄했다. 조금은 심리적 여유가 생겼는지 평생 전장을 함께 누빈 이두란에게 사로잡자고 말한다.


"형님. 사로잡으려면 아군의 희생이 너무 커질 겁니다."
"할 수 없군. 그럼 내가 저 놈 투구의 정자(頂子)를 쏴서 투구를 벗길 테니 그 틈에 그대가 즉시 쏴서 죽여라."

말을 끝내자마자 이성계는 채찍을 들고 말을 몰았다.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아기바투에게 말을 달려 접근한 이성계는 연달아 활을 쏘아 정자를 맞혀 투구의 끈을 끊어놓았다. 아기바투의 투구가 떨어지자 이 틈을 기다린 이두란이 바로 활을 쏴서 그를 죽였다. 


피바위 운봉에서 인월로 흘러가는 람천변에 있는 바위. 이성계의 고려군에게 쫓긴 왜구가 몰살당해서 그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바위에 붉은 기운이 있다.
피바위운봉에서 인월로 흘러가는 람천변에 있는 바위. 이성계의 고려군에게 쫓긴 왜구가 몰살당해서 그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바위에 붉은 기운이 있다. 홍윤호

아기바투가 전사하자 왜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고려군은 기세를 타고 왜구를 몰아붙여 남쪽 협곡 아래로 밀어내 마구잡이로 몰살시켰다. 하천은 피로 물들었고 하천에 있었던 큼지막한 바위에는 피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소 1만여 명 이상을 헤아리던 왜구는 약 70여 명만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남부지방의 육지를 자기 땅처럼 누비며 약탈을 일삼았던 왜구의 기세가 꺾인 대표적인 전투, 황산대첩이다.

황산대첩비와 피바위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과 인월면은 지리산 북쪽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작은 산중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고장들이다. 평탄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해발 고도는 400~500m 대에 이른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낮아 보이는 산도 최소 600m가 넘는 산들이다. 얼핏 보기에 낮은 뒷동산도 서울의 관악산보다 높다는 이야기다.

이 고원 지대의 운봉과 인월을 연결하는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에서 인월로 가다 보면 왼쪽 낮은 산기슭에 황산대첩비지(사적 제 104호)가 있다. 비교적 넓은 분지가 좁아지면서 인월로 가는 좁은 통로가 막 시작되는 지점이다.

황산대첩비지  1957년에 비석을 다시 세우고 1973년에 담장을 두르며 정비하였다.
황산대첩비지 1957년에 비석을 다시 세우고 1973년에 담장을 두르며 정비하였다. 홍윤호

이곳이 아마 이성계의 고려군이 앞쪽 황산을 향해 진군과 돌격을 시작한 지점일 것이다. 조금만 가면 바로 하천 양쪽이 좁아지면서 양쪽 산봉우리가 하천을 압박하는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왜구가 먼저 장악한 양쪽 산 경사면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으므로 고려군의 희생도 꽤 컸겠다. 더구나 진포해전의 패배로 배가 다 불타고 내륙에 고립된 왜구가 지리산과 섬진강을 거쳐 본국으로 달아나려고 기를 쓰고 있었기에 더욱 고려군에 악착같이 대항했을 것이다.

람천을 건너 야트막한 산자락에 들어가면 햇빛을 잘 받는 남향 터에 직사각형의 담장이 있다. 그 안에 황산대첩비각과 파비각, 사적비각이 있다.

본래 황산대첩비는 오른쪽 파비각에 누워있는 비석이다. 조선 선조 10년(1577)에 황산대첩의 승전 사실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호조판서 김귀영(1520∼1593)이 내용을 쓰고, 송인(1517∼1584)의 글씨로 새긴 비석이었다. 당시에는 비각(碑閣), 별장청(別將廳) 등의 다른 건물도 지어 비를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복원한 황산대첩비  일제가 파괴한 것을 1957년에 다시 세웠다. 이때 비석은 오석을 사용하여 표면에 다시 글을 새겼다.
복원한 황산대첩비 일제가 파괴한 것을 1957년에 다시 세웠다. 이때 비석은 오석을 사용하여 표면에 다시 글을 새겼다. 홍윤호

하지만 1945년 1월, 일제가 남원의 경찰과 소방대를 동원, 비석을 폭파하고 비문에 새긴 글자들을 쪼아서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때 비석 뿐 아니라 비석을 세웠던 아랫부분인 귀부도 박살났다.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제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선조가 크게 당한 내용인데다 자기들이 멸망시킨 조선 왕조를 건국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이니 전혀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파괴된 비석은 해방 후 방치되어 있다가 1957년에 깨진 받침돌, 귀부 부분을 다시 붙여 세우고, 비석도 오석으로 새로 마련해 세웠다. 그것이 지금 보는 정면의 대첩비각이다. 높이 4.25m로, 본래의 황산대첩비와 같은 높이다.

파비각 속 비석 파편  일제는 황산대첩비를 파괴하면서 글자도 쪼아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파비각 속 비석 파편 일제는 황산대첩비를 파괴하면서 글자도 쪼아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홍윤호

어휘각  이성계가 황산대첩 다음 해에 전투에 참여한 장군과 종사관들의 명단을 기록한 바위벽. 여기도 일제가 정으로 쪼아서 글자를 훼손시켰다.
어휘각 이성계가 황산대첩 다음 해에 전투에 참여한 장군과 종사관들의 명단을 기록한 바위벽. 여기도 일제가 정으로 쪼아서 글자를 훼손시켰다. 홍윤호

황산대첩비지 왼쪽 작은 숲길로 가면 어휘각이 있다. 큰 바위면을 덮은 누각인데, 황산대첩 다음 해에 이성계가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8명의 장군과 4명의 종사관(문관)의 명단을 새기고 이들의 공을 기렸다 한다. 이곳 역시 1945년 일제가 글자를 쪼아버리는 바람에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이곳에서 하천을 따라 인월 방향으로 가면 도로에서도 볼 수 있는 피바위가 있다. 도로를 따라 좀 더 지나가면 달오름마을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피바위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둑길이 있다.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교차할 수도 없는 좁은 비포장 길이니, 차를 갖고 간다면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는 것이 안전하다. 남원시 측에서 '황산대첩지 피바위'라고 써서 세운 안내 기둥이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쉽다.

하천에 넓적하게 퍼진 피바위에는 곳곳에 물이 흘러 들어가 파여서 둥그렇게 고인 포트홀(pot hole)이 눈에 띈다. 섬진강 상류나 남한강 상류 물살이 빠른 하천에서 볼 수 있는 포트홀이 여기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흔적은 분명하다.

바위면 곳곳에는 약간 붉은 빛을 띤 부분도 있었다. 몰살당한 왜구들의 핏자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물론 진짜 핏자국은 아니다. 유명한 개성의 선죽교에는 여기서 피살당한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피살당하지 않았다. 그러니 핏자국이라고 하는 것이 진짜 핏자국은 아닌 셈(<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몽주는 말을 타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고여 등에게 추격 당해 피살 당한다. 그 장소가 선죽교라는 것은 조선 후기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덧붙여진 전설과 함께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이곳 피바위가 상징성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왜구들이 몰살당한 곳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붉은 빛이 돈다고 해서 핏자국이라 할 수는 없다. 

피바위  운봉에서 인월로 흘러드는 람천변에 있다. 24번 국도를 타고 가면서도 볼 수 있다.
피바위 운봉에서 인월로 흘러드는 람천변에 있다. 24번 국도를 타고 가면서도 볼 수 있다. 홍윤호

다만 이 하천 일대에서 드물게 너럭바위로 누워 있다 보니 눈에 띄어서 피바위라는 별칭이 붙은 듯하다. 그래도 이 바위가 있기에 그 당시의 치열한 전투 장면을 상상하며 주변 지형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다.

행정구역은 남원에 포함되지만, 물줄기의 방향은 남원과 섬진강 쪽이 아니다. 운봉이 상류이고 인월이 하류 쪽이라 이 물줄기는 경남 함양으로 흘러나가 경호강과 남강에 합류하고 최종적으로 낙동강에 들어간다.

전쟁이 남긴 것

고려 말, 고려는 북쪽으로 홍건적의 침입과 남쪽으로 왜구의 침입 때문에 숱한 고통을 겪었다. 홍건적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기도 했으니 그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고, 왜구도 남해안을 거쳐 올라와 수시로 강화도 일대와 개경 입구에서 약탈과 살육을 반복하며 내륙으로도 들어가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왜구가 주로 노렸던 것은 세곡을 싣고 개경으로 들어가는 조운선들이었다. 이러니 고려 정부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그런데 반복되는 왜구의 약탈이 좀 더 파괴적이고 위협적 성격을 띤 것은 이들이 연합군을 편성해 대규모로 몰려 온 1380년이다. 이 해 가을, 과거에 유례가 없던 500척의 대함대를 동원한 왜구가 진포(오늘날 금강 하구 일대로 추정)에 상륙해서 내륙 깊숙이 약탈해 들어갔다. 이때 새로운 신무기인 화포를 장착한 고려는 100여 척의 함대를 동원해 왜구를 쳤다.

수적 열세였으나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해서 왜구의 배들을 격파하고 대부분을 수장시켰다. 그동안 왜구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끝에 거둔 진정한 승리, 진포대첩이라 불린, 빛나는 승리였다.

하지만 본국으로 타고 갈 배를 잃고 퇴로가 막힌 왜구는 내륙 지방을 휘젓고 돌아다녔고, 경북 상주와 경산을 거쳐 경남 함양으로 들어왔다가 이성계의 고려군을 만난 것이다. 이미 함양에서 고려군을 크게 격파한 그들은 이성계의 고려군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맞섰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다.

황산대첩비각과 파비각  복원된 황산대첩비는 황산대첩비각에 세워져 있고, 파괴된 파편들은 파비각에 보관하고 있다.
황산대첩비각과 파비각 복원된 황산대첩비는 황산대첩비각에 세워져 있고, 파괴된 파편들은 파비각에 보관하고 있다. 홍윤호

이후에도 왜구는 여러 번 고려를 공격했지만, 이같이 대규모의 선단을 구성해서 내륙까지 휘젓고 다니는 사례는 이제 다시는 없었다. 그만큼 고려의 대응력과 전투력이 강화된 부분도 있다. 게다가 이후 왜구는 가까운 고려를 벗어나 훨씬 거리가 먼 중국 서남부 해안과 동남아시아까지 본격적으로 약탈전을 다니게 된다.

고려 말 이 땅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전시 상태로 몰아넣은 왜구가 단순한 왜구일 수는 없다. 이들 왜구는 1350년경부터 70~80년 간 우리 땅은 물론 중국 서남부 해안,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까지 침공해서 이 지역의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인력과 군대, 물자가 조직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 이 정도의 폭력 사태를 해적질로만 볼 수는 없다.

전쟁사가 임용한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휩쓴 이 폭력적인 왜구의 질주는 일본 사회의 내적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일찍부터 봉건 사회로 쪼개져 외부적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분열이 경쟁을 낳고, 지방세력 간의 생존 경쟁이 농업과 상업,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지방세력들만으로 침략군을 편성하고 전쟁을 수행할 만한 인원과 물자를 조달할 수 있을 정도가 된 데다 이들의 욕구를 통제할 만한 중앙 권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출현한 것이 왜구였다는 말이다.

고려는 갑자기 남쪽에서 나타난 이 강적에 대응하여 왜구를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화포를 개발하고 해상 전술을 마련하여 수군을 발전시키게 된다.

조선 초기에 이미 다양한 무기와 화포를 개발, 개량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와 감시의 눈길을 유지하며 때때로 쓰시마섬을 공략한 것은 조선 스스로가 일본을 위험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아마 분열된 일본의 통일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남북한의 통일을 원치 않듯.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고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대등하게 맞서 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200년 전 고려 말에 치열하게 싸우고 그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대응 무기와 기술, 그리고 전술을 발전시킨 것이 그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크게는 두 조각, 그리고 여러 개의 파편들로 쪼개진 황산대첩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증명하는 유물이지만, 이러한 파괴를 허용했던 외세의 지배체제가 이 땅에 다시는 들어서지 말아야 할 증거물도 된다.

분노하기보다는 기억하자. 감정보다는 차분한 이성이 필요하다. 한반도 주변에 만만한 상대는 그 누구도 없다.

운봉 바래봉 철쭉  대개 5월 10일경~15일경에 운봉 바래봉 능선에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운봉 바래봉 철쭉 대개 5월 10일경~15일경에 운봉 바래봉 능선에 철쭉이 장관을 이룬다. 홍윤호

답사 정보

* 주소: 전북 남원시 운봉읍 가산화수길 84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상에 있어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나친다.

* 자가용으로는 광주대구간 고속도로(구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IC에서 나와 인월→24번 국도 운봉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황산대첩비 안내판을 보고 들어가 람천을 건너면 우측에 송흥록 박초월 생가가 있고, 좌측에 황산대첩비지가 있다. 주차는 송흥록 생가 쪽에 하는 것이 안전하다.

* 대중교통으로는 남원 시내의 남원역과 남원공용버스터미널 앞에서 인월 행 120번, 130번, 132번, 133번, 134번, 141번, 142번 시내버스 등을 타고 가다 전촌, 화수에서 내려 약 500m 걸어간다. 버스는 30분~1시간 간격으로 있다.

* 운봉에는 5월 중순경까지 지리산 능선에서 철쭉의 바다를 볼 수 있는 바래봉이 있고, 인월은 지리산 뱀사골과 실상사, 백무동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지리산 일대의 계곡 산행이나 둘레길 걷기, 문화유산 답사를 함께 하기 좋은 곳이다.
#황산대첩비 #남원 황산대첩비지 #파비각 #이성계 #아기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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