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생가 복더미마을이라 불리던 마을 안쪽에 1995년 복원한 초가집 생가가 있다.
홍윤호
1896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영해 의병의 대원으로, 1906년 4월에는 영릉 의병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1908년 12월 현상금에 눈먼 부하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30세의 짧은 나이를 불꽃처럼 살다 간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장으로 의병을 이끈 2년 8개월간 경상북도 영양, 봉화, 진보, 청송 등의 산골과 울진, 평해, 영해, 영덕 등의 동해안, 삼척 등 강원도 동해안을 넘나들며 일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각종 건물과 근거지를 공격하며 숱한 전투를 치르고, 2차에 걸친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작전과 신돌석 생포작전에도 끝끝내 잡히지 않고 산악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였던 인물.
그는 아내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일제의 회유책에 의한 것임을 금세 알아차리고 부하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매몰차게 대했다. 자기를 따르는 의병 대원들에 대한 일종의 메시지이기도 했을 것이며, 자기 뜻에 맞지 않게 일본군의 의도대로 움직인 아내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의 부모를 태백산맥 산줄기 깊은 계곡 마을에, 자신의 처자식을 자기가 믿는 산골 마을 나루터지기 집에 숨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이런 인물이었다. 이(利)를 멀리하고 의(義)를 추구한 의지의 인물, 이 정도의 강단이 있었기에 처자식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험한 세월과 강력한 일본군의 탄압을 이겨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