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의 상황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기획시대㈜
'황금동 콜 박스 여성' 경우처럼 화류계 여성들이 불의에 항거하며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집단차원의 저항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다. 그만큼 황금동 여성들의 에피소드들의 감동 지점은 영화보다 극적이고 소설보다 감동적이며 상상보다 허구적이다.
또 다른 시민 정경숙(여, 53세)씨는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그는 중학생으로 집이 역시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동명동'이었다. 주민들이 단체로 시민들 물을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물이랑 밥 지어서 날라주고 와서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는 거예요. 시내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로 열심히 한다고. 음식도, 시민군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 열심이라고."
그는 어릴 적 친구들이 황금동 주택가에 살아 자주 놀러 가곤 했다고 한다.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말 듣고 신기했어요. 황금동 여자들이 열심히 한다는 거요. 어릴 때 황금동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그 앞을 자주 지났거든요. 친구 집 갈 때마다 무서워서 잘 쳐다보지도 못했던 여자들이 음식하고 물 나르고 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됐어요. 그분들이 헌혈도 제일 많이 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죠."
그러면서 그는 황금동 여성들이 5.18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세한 원인을 금남로와 가까운 환경 탓으로 확신했다.
"우리 동네만 해도 금남로하고 가깝다 보니 주민들이 똘똘 뭉쳐 시민군들 뒷바라지 하고 남자들도 많이 나갔어요. 오죽하면, 그 후에 우리 동네는 5월에 제사가 한꺼번에 몰린 동네가 되 버렸어요. 그만큼, 시내 가까운 영향이 컸죠. 그런데 황금동은 어땠겠어요. 금남로랑 딱 붙어 있잖아요."
지금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정씨는 타지에서 가끔 5.18 경험을 말할 때라도 황금동 여성들 이야기는 잘 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처음, 사람들이 황금동 이야기를 들려주면 잘 믿으려 하지 않고 되레 꾸며낸 이야기 대하듯 하곤 했던 경험 때문이다.
황금동 여성들의 5.18항쟁 참전 의미를 혹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의 일시적 호기심이나 분위기에 휩쓸린 순간적 돌출 행동으로 폄하한다면 그것은 5.18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이다.
그들이 계엄군진영을 향해 극렬한 저항을 드러내고 시민군들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조달하고 헌혈 침상 위에 가장 먼저 팔을 걷고 눕고 시위 군중을 적극적으로 숨겨주었던 행위 어느 것 하나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는 자신들의 도시공동체와 시민들을 향한 강한 애정과 연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갖춰지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모험이었다. 5월 항쟁에서 보여준 그녀들의 용기와 헌신은 그들이 이 사태의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들도 여느 광주시민들처럼 깨달았던 것이다. 이 상황이 광주라는 문제 도시를 게토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과 명분을 편취하기 위한 정치군인들의 사악한 음모하는 것을. '전두환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단순 유언비어만이 아닐 수 있음을 무자비한 계엄군들의 만행은 증명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나와 가족, 이웃, 도시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자구책으로 총을 들어야 했다. 남자들은 총을 들었고 총이 없는 여자들은 후방에서 지원했다. 모든 시민이 일심동체가 되어 항전태세로 전환한 상황에 유흥업소 직업 여성들의 출현이라고 하등 이상할 것 없는 현상이었다.
더구나 당시 그들이 몸담고 있는 황금동 일대는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시국 관련 집회와 시위가 발발하던 민주화의 성지 '금남로' 생활권에 속해있었다. 거리에 살포되는 유인물과 벽에 나붙는 대자보가 시선을 붙잡는다. 데모꾼들의 구호와 함성, 민중가요가 귀를 자극한다. 최루향기마저 내성이 생긴다.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피 흘리며 끌려가는 사람들을 모습을 일상으로 목격한다. 민중가요 몇 소절쯤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매일같이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그 모든 시위 친화적인(?) 환경이 그들의 일터였다. 그녀들의 직업 환경이야말로 의식화 교육의 불온한 현장 학습장이었던 셈이다. 간접적인 학습효과와 의협심 강한 그들의 기질이 만나 5.18항쟁에서 그 숨겨진 투지와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됐던 것이리라. 그녀들은 어차피 80년 5월의 여인이 될 운명이었다.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채 계엄군의 총검 앞에 던져진 광주의 공포와 외로움은 곧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짓밟히는 직업여성인 자신들의 처지와 동격이었다. 계엄군에 맞서 도시는 계급과 차별이 타파되고 빈부귀천이 무의미해졌다. 시민들은 무상으로 물자와 식량을 나누었고 그래서 도둑들도 거지들도 부정한 활동을 접었다. 세상과 단절된 도시는 스스로 해방구를 선포하고 위대한 자치공동체를 구현했다.
그런 황홀한 세상이야말로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한 운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에게는 꿈같은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거친 밑바닥 인생을 헤치며 단련된 무모함과 대범함을 무기로 신명 나게 싸웠다. 난생처음 밝은 광장에서 일반 사람들과 같이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치고 음식을 나누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편견 어린 시선을 받지 않고 민주시민으로 인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광주는 80년 5월 황금동 여성들에게 빚을 졌다 '황금동 콜 박스 여자들'이라는 세간의 호칭은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말해준다. 광주민중항쟁의 주역 '황금동 주민'인 자연인집단으로 존칭되어야 한다. 그것이 38년 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다. 대외적으로 백지상태인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광주시민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존중받아 마땅할 의인들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와 존중에서 배제된다면 자유, 평등, 인권, 정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표방했던 5월 정신에도 배치된다. 그해 봄, 이 도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도덕적 의무는 이 여성들에 의해 역으로 실현되었다. 광주는 80년 5월의 황금동 여성들에게 빚졌다.
현재 황금동 일원은 대대적인 도심 정비 사업으로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최신 유행과 세련된 문화의 거리로 일신하여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핵심 번화가로 변모했다. 그 옛날 직업여성들의 호객행위와 폭력배들의 무질서가 난무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지금 그 거리의 활기찬 자유와 세련된 문화를 만끽하는 젊은 세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 그곳에서 자신들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반강제로 억류된 채 웃음을 팔아야 했던 슬픈 사연을. 그럼에도 그곳은 아름답고 용감한 여성전사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적들로부터 무고한 시민들을 지켜낸 혁명의 사적지라는 사실을.
황금동에선 혁명의 꿈과 낭만이 황금처럼 물결쳤다. 그렇게 어느 해 봄 황금동 지명에 얽힌 유래는 전설이 되었다. 80년 5월 황금동의 여성들은 봄날의 광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혁명의 꽃이었다. 38년 동안의 잠복기는 증명한다. 그들은 타락, 퇴폐, 문란, 무질서를 퍼뜨리는 무서운 보균자가 아니었다. 자유, 민주, 정의, 사랑, 연민 등의 강력한 항체를 지닌, 그들의 피는 뜨겁고 맑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4
공유하기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