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국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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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서울 남산 국악당에서 '평롱, 그 평안한 떨림'이라는 국악 공연을 봤다. 평롱이란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이라 할 수 있는 가곡의 한 종류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탄한 중간 소리로 시작하는 노래다. 이 공연은 종묘제례악, 수제천, 아리랑, 판소리 등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오른 우수한 한국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품격 국악콘서트다.
'국악' 하면 지루하거나 감각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이 있을 수 있는데 이 공연은 그 모든 편견을 넘어선다. 우선 연주자들이 젊다. 그러니 연주가 활기차고 힘이 넘친다. 대금, 해금, 가야금 여러 악기가 있지만 내 영혼을 강탈한 건 사물놀이다. 타악기가 인간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더니 사실이다. 듣고 있자니 호흡이 가빠지고 뭔가 모를 열정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 영혼을 강탈한 사물놀이호기심 많고 즉각적인 나는 사물놀이 배울 만한 곳이 있는지 검색했다. 집근처 문화원에서 수강생을 받고 있었다. 수강료는 한 달에 단돈 이 만원. 당장 접수했다.
수업 첫 날, 문화원 강당에 도착하니 수강생은 달랑 5명. 선생님과 수강생들이 일제히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생각하며 볼을 쓱쓱 문지르는데 그 중 한 분이 "애기가 왔네, 이쁜 애기가." 박신양의 "애기야 가자" 이후로 처음 듣는 그 '애기.'
그러고 보니 수강생들의 연령이 높아 보이긴 했다. 사물 가르치시는 선생님과 세무사 사무실에 다니는 수강생 언니(아래 언니라 지칭)는 50대 중반, 다른 네 분은 70대 전후다. 전원 여자, 분위기는 알록달록했다.
언니는 수첩과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이제부터 애기가 총무야." 처음 보는 날 뭘 믿고 돈을 맡기나 싶어 어리둥절한 나는 봉투를 열어보고 이유를 알았다. 봉투에는 남은 회비 1만2800원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나는 45세의 나이에 사물놀이반 총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애기'가 되었다.
회비는 한 달에 오천 원. 그 돈으로 커피나 녹차를 사고 혹시라도 돈이 모이면 회식까지 한다. 고로 나는 커피나 녹차가 떨어지지 않게 사다놓고 매달 초면 사채업자 같은 얼굴로 오천 원을 내라고 은근한 압박을 해야 한다.
집에서도 가계부를 써본 적 없는 데다 있으면 다 써버려야 속이 시원하고 어디다 썼는지는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십 원짜리까지 지출을 적고 영수증을 수첩에 첨부해야하는 총무라니 '미션이 파서블' 할는지 모르겠다.
사물은 장구, 징, 북, 꽹과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구부터 배우는 게 순서다. 문화원에는 모든 악기가 구비되어 있었다. 참으로 돈 안 드는 좋은 시스템. 장구, 그까이꺼 대충 두드리면 되는지 알았더니 천만의 말씀이다.
오른손 왼손이 동시에 움직이기도 하고 따로 움직이기도 해야 하는 고난이도 기술에 순발력과 리듬감마저 필요하다. 게다가 악보를 다 외워야한다. 사물이 합주를 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서로 악보를 다 외우지 않으면 연주를 할 수 없다. '어리디 어린 사람'(?)이라 금방 따라 할 거라 말씀하시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렇게 어리지는 않다.
네 분의 어르신 수강생 분들은 친구 사이다. 장구를 시작한 지 1년 정도 되었고 언니는 3년이 되었단다. 나는 맨 뒤에 앉아 선생님을 마주한 채, 다른 수강생들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서 장구를 친다. 재미있는 건 어르신 네 분이 모두 같은 미용실을 다니는지 헤어스타일이 똑같다. 딸이 있는 할머니는 머리 스탈이 고대기로 만 것처럼 우아한데, 아들만 있는 할머니는 뽀글뽀글 부시맨 파마라더니 모두 아들만 두신 것 같다. 죄송하게도 너무 귀여우시다.
본인의 연주가 틀렸을 때 어르신들의 반응이 다 다르다. 1번분. 화를 낸다. "아이구, 지겨워. 왜 자꾸 틀리는 거여." 2번분. 크게 웃는다. 전원주 웃음소리랑 똑같은 웃음소리를 1분간 낸다. 3번분. 자책한다. "늙으면 죽어야해. 뭐한다고 여기 와서 다른 사람까지 방해하고 있는지 몰라". 4번분. 사과한다. "미안해서 어떡해. 나 때매 또 멈췄네."
선생님(충청도 분)의 반응은 한결같다. "아이구 괜찮아유, 대회 나갈 것도 아닌데 천천히 해유." 이런 공백은 십 분마다 발생하고 그 때마다 언니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는 최대한 해맑은 얼굴로 '애기미소'를 보냈다.
'흥 시스터즈'가 되다3개월이 지난 2016년 봄, 드디어 내가 진도를 따라잡았다. 맨 뒷자리에서 맨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님은 꽹과리를, 언니는 북을, 나와 나머지 분들은 장구를 쳤다. 일주일에 한번 수업이라 어르신들은 일주일 후면 백지 상태로 리셋 되어 천진한 얼굴로 나오신다. 나 보기가 민망하셨는지 운동 삼아 나온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팔 운동은 엄청 된다. 한 곡 신나게 두드리고 나면 가슴이 뻥 뚫리고 땀이 흠뻑 난다.
그해 여름 방학이 되자 근처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사물을 배우러 왔다. 동아리에서 웬만큼 치는 학생들이었는데 정확하게 배우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청년 셋이 왔을 뿐인데 우리 팀은 앙상블에서 오케스트라가 된 듯 소리가 웅장해졌다.
학생들은 한시적으로 왔다 감으로 회비는 없다. 게다가 나는 수업 때마다 빵과 과자를 사비를 털어 함께 나눴다. 어린 학생들이 '우리 것'을 배우러 오는 게 신통해서. 내가 무슨 문화부 장관도 아닌데 참 오지랖도.
두 달 만에 학생들이 돌아가고 우리 팀은 원래의 소리를 찾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갑자기 학생들이 사라지자 스테레오 사운드는 온데간데없고 빈약한 모노 사운드만 덩그러니 남았다. 갑자기 초라함이 몰려왔다.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님의 침묵, 한용운) 이 시는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든 이별은 허전하다. 사랑했건 안했건 상관없이. 민요가 전공인 사물놀이 선생님이 국악 뮤지컬에 출연했다. 뱃사람인 남편이 고기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유명을 달리하고 남겨진 새댁 역할이다. 갓난아기를 등에 없고 남편을 그리는 사모가를 열창하는데 이 부분이 뮤지컬의 백미다. 나와 세무사 언니는 꽃다발을 준비해서 공연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공연은 1, 2부로 나뉘었다. 1부는 민요 대잔치, 2부는 국악뮤지컬이다. 1부 공연이 시작되자 만석인 객석이 출렁거렸다. 경기민요는 귀에 익숙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의 공연들은 엄숙히 듣기만 하는데 이 공연은 '록 페스티발'에 온 것처럼 자유롭다.
옆에 앉은 언니도 몸이 들썩거리더니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언니를 힐끗 보며 웃었다. 이게 응원이라 느꼈는지 언니는 점점 달아올랐다. 급기야는 무대 가수보다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슬며시 언니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진정시키고자 한 나의 의도가 무색하게 언니는 내 손을 잡더니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을 빼고 싶지만 이미 민요에 접신한 언니가 놔주질 않는다. 때문에 연결된 내 한쪽 어깨도 바람풍선 사람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흥 시스터즈'가 되었다.
2부가 시작되고 선생님이 무대에 올라 사모가를 열창했다. 얼마나 몰입해서 불렀는지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나도 덩달아 뭉클해졌다. 공연이 끝나 선생님께 꽃다발을 드리며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심이었다.
1년 후, 슬프게도 우리 사물놀이반이 인원수 미달로 폐강이 되었다. 네 분의 어르신들이 개인사정으로 그만두신 때문이었다. 사물수업을 하는 다른 곳을 기웃거렸으나 나는 첫 정을 잊지 못하고 적응이 힘들어 결국 그만 뒀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은데 아직 당기는 게 없다.
잊고 있던 우리 것... 다시, 판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