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지도자의 길>, <민족중흥의 길>, <새마음의 길>, <민족사의 새지평>, <헌수송>
조경국
정치인들이 낸 책은 손님들에게 인기도 없고, 책방에서 대접도 시원찮다. 굳이 따진다면 철 지난 재테크나 자기계발서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나 할까. 그보다 험한 취급을 받는 책도 있다. 글과 행동이 다른 정치꾼들이 낸 것이다. 굳이 이 자리에서 실명을 거론하고 싶진 않다. 주로 선거를 앞두고 출판기념회를 하거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급히 낸, 자신의 막말과 과거를 미화하는 그런 에세이가 대부분이다.
몇 번 책방을 이사하며 정치인들의 책은 많이 버렸다. 어떤 책이든 버릴 때는 마음이 아프지만 희한하게도 정치인들의 책은 버릴 때도 아쉬운 마음이 없다. 그렇다고 모든 정치인의 책이 그런 건 아니다. 그의 정치 행보가 어떠했던지 간에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책들은 따로 모아둔다.
예를 들면 탄핵된 박근혜 대통령의 첫 책 <새마음의 길>(1979년)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중흥의 길>(1978년)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이 두 권은 구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여든 살 생일(1955년)을 맞아 관리와 명사들의 축시를 모은 당시 정부 공보실에서 펴낸 <헌수송>도 마찬가지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야 정치인이던 시절(1979년) 몽고메리 장군의 책을 번역한 <지도자의 길>(원제 : The path to leadership)도 있다. 경향신문사가 '전두환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홍보하는 <민족사의 새지평>(1983년)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이 소중하고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가 역사의 증거기 때문이다.
일반 독자가 읽기 위해 이런 책을 찾을 리는 거의 없을 테고, 결국 사료의 역할만 할 것이다. 사실 이 책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손님을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책을 팔아야 하는 처지지만 이런 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언젠가 책방을 떠나 그 시대를 연구하는 눈 밝은 학자의 서가에 꽂히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의 증거로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애정이 없으나 이렇게 보관하고 있는 책도 있지만 반대로 무척 아끼며 따로 챙겨둔 책도 있다. 헌책방 책방지기가 아닌, 독자로서 아껴 개인 서가에 꽂아둔 것이다. 한 권은 고 김근태 의원의 <희망은 힘이 세다>고 또 한 권은 노회찬 의원의 <힘내라 진달래>다.
그의 촌철살인보다 좋아했던 <힘내라 진달래>지난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간의 일들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나는 그를 정치인이 아닌 유머와 위트를 아는 어른이라 좋아했다. 그런 어른을 찾아보기 얼마나 힘든가. 사소한 것도 무겁게 만드는 능력은 보잘것없으나 무거운 것도 가볍게 만드는 힘은 귀하다. 앞뒤 없이 꽉 막힌 한국 정치에서 노회찬 의원은 청량한 존재였다.
시민으로서 정치를 외면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 정치는 피로와 스트레스의 효과가 확실한 내복약이라 가까이할수록 내상이 커질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만큼 정치 피로에 강한 국민이 또 있을까 싶다.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 정치사가 맑았던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대개 자신의 잇속과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국민을 피곤하게 만드는 날이 훨씬 헤아리기 쉬울 테다.
책방지기다 보니 그의 촌철 '언변'보다 담백 '글'을 더 좋아했다. 김근태 의원의 <희망은 힘이 세다>와 함께 따로 빼놓은 그의 책은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였다. <힘내라 진달래>를 빼놓은 이유는 노회찬 의원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책이 솔직하게 기록했던 일기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날그날의 잊어버리기 아까운, 의의 있는 생활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다. 보고 들은 것 가운데, 또 생각하고 행동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을 적어두는 것은, 형태가 있는 것이나 형태가 없는 것이나 모조리 촬영한 생활 전부의 앨범일 것이다. 그러나 일기는 앨범과 같이 과거를 기념하는 데서만 의미가 다 하지 않는다. 과거보다는 오히려 장래를 위한 의의가 더욱 크다."
상허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에 나오는 글이다. 편지글이나 일기를 책으로 묶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의 독서 취향 때문이고, 이태준 선생의 말처럼 '장래를 위한 세 가지 의의', 그러니까 수행, 문장 공부, 관찰력과 사고력의 훈련을 위한 본으로 삼기 위해서기도 하다. 책으로 묶인 다른 이의 일기를 읽는 이유다. 노회찬 의원의 <힘내라 진달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진보정치의 쾌거, 그 이면에 숨겨진 고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