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 에디터
김하늘
고통이 차곡차곡 쌓여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잠을 줄여가며 육아와 가사를 하며 서툰 솜씨로 ppt를 만들고, 보고서를 쓰고 있을 때, 금방이라도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내게 전공 교수님이 한 마디를 건넸다.
"은주씨, 아이 키우며 공부하는 게 많이 힘들지? 나중에 아이에게 정말 멋진 엄마로 기억될 거야."
이 한 마디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이를 오롯이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 엄마로서의 무게, 책임감 등을 모두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내 아이, 내 가족이 나를 응원하며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통일'을 위한 한 걸음
그 다짐이 현실이 돼 4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학사모를 썼다. 졸업하고 탈북민의 한국사회 적응과 통일시대 준비를 위한 강의를 시작했다. 북한이탈주민 전문 사회복지사로서 세상에 나가기 전, 더 전문적으로 북한에 대해 알고 싶었고, 또 먼저 정착한 선배로서 다른 탈북민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 선택하게 되었다.
강의를 할 때 항상 강조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국 땅에 온 북한이탈주민들이 곧 '작은 통일'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작은 통일을 넘어 진정한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분단되어 언어를 비롯한 생활 방식, 사고, 예의 등 많은 것이 달라진 채 살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오기만 하면 삶이 나아질 거라고 기대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우리이기에, 다시 목숨을 걸고 이 사회에 적응을 해야 한다. 한국 문화와 사람과, 그리고 우리를 '이방인'으로 보는 시선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북한이탈주민이 아무리 열심히 한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해도 우리를 멀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현실 때문에 정부와 시민단체가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탈북민들이 많다. 게다가 지원 기관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지 못하면 한참 적응해가던 사람들도 다시 상처를 입고 낙오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내가 통일을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가족들의 재결합이다. 아직도 이산가족이 많다. 아니, 사실은 계속 생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를 비롯해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여전히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한다. 한 민족이 떨어져 사는 것도 이렇게 애끓는데, 한 세대 안에서 가족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종종 생각하곤 한다. 누군가는 가족이 오다가 실종되었다더라, 누군가는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탄다 하더라, 누군가는 결국 어머니는 만났지만 언니를 잃었다더라. 수많은 이산가족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나의 사회복지는 여기까지 당도할 것이다. 지금은 북한이탈주민으로서, 그리고 곧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북한이탈주민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 하지만 내 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통일, 그 이후의 통일 한국 사회의 복지까지 뻗어 있다. 통일이 된다면 급작스럽게 달라진 세상에 적응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나는 현장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사회의 복지를 위해 힘쓰고 싶다. 내가 겪었던 고독, 외로움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
이 사회에 대한 감사, 그리고 보답
강연을 다니며 꼭 빼놓지 않고 하는 마지막 이야기가 '감사'다.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탈주민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 적응할 수 있도록, 배울 수 있도록,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와 한을 풀어주기 위한 환경과 기회를 마련해준다.
한국을 통해 세계를 알게 되었고, 그 속에서 배우고 싶었던 열망을 마음껏 풀 수 있었기에 나는 이 그 모든 것들에 너무 감사하고, 노력으로 보답하려 한다. 감사함을 잊지 않고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나만의 생각이 아닌 북한이탈주민 모두의 마음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 살았는지 모른다. 북한에서는 적대 계급이라는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는 조선족이냐 중국인이냐부터 시작해서, 쉽게 대학을 왔다든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편견까지.
하지만 난 그 안에서 더욱 악바리처럼 버텼고 강해졌다. 언젠가 내가 마땅한 능력을 갖추어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는 전문가가 되기를 원한다. 그 꿈을 위해 나는 노력했고, 앞으로도 나에게 좋은 기회를 준 이 사회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 난 이 사회가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가족들에게 고맙다. 매일매일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요즘도 논문을 읽고 있다. 졸업 후에도 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이 끈은 나와 이 사회를 잇는 생명줄이니까.
취재, 글, 삽화: 김하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