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대 총선(2008)에서 서울 노원병 지역구에 출마했던 노회찬. 사진은 2008년 3월 26일 노원구 상계동 중앙시장 인근을 찾아 지역 주민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모습.
유성호
그때 경쟁 후보는 지역 아이들에게 '영어공부 시켜주겠다'고 선거운동을 했다. 국회의원 선거보다는 학원 홍보에 적당한 공약이었다. 결과는 알려진 것과 같다. 말 잘하는 노회찬을 외국말 잘 하는 홍정욱이 이겼다.
그 후 노회찬 대표는 2012년 선거와 2016년 선거에서 두 번 당선됐었다. 두 번 다 야권연대를 통한 승리였다. 야권연대를 했어도 2014년 동작을 보궐선거에서는 낙선했다.
사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는 노회찬 대표조차도 당선이 어려운 게 지역구 선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소선거구제보다는 중선거구제가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중선거구제 하에서라면 노회찬 대표의 정치 인생이 그렇게 곡절로 점철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대 정당의 독식으로 정치를 고인물로 만드는 소선거구제의 단점이 중선거구제가 도입된다고 해서 개선될 수는 없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중선거구제 도입이 아니라 '지역구에서 지나치게 많이 선출하는 선거제도'를 '합리적 비례선출제도'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다.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너무 많이 뽑는 게 문제인 이유는 대한민국의 '지역'이란 이미 60년 동안 보수양당이 선점해온 보수적 생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은 당연히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다. 중선거구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지역구는 이미 기존 정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 네트워크가 매우 촘촘하다. 이 지역네트워크의 맨 꼭대기에는 보통 지역의 기득권 집단들이 있다. 지역 국회의원, 기초자치단체의 장, 지역기업의 대표, 지역의 금융기관·학교법인·언론사·복지기관의 장 같은 사람들이다. 그 밑에 각종 관변단체가 있고, 이들이 보수적 풀뿌리 네트워크를 매우 강력하게 구축하고 있다.
진보정치세력은 그 동안 풀뿌리 정치 안 하고 뭐했냐고? 진보정치의 조상들은 해방 후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죽거나 제압당했다. 여운형이 그렇고, 조봉암이 그렇다. 현재의 정치는 오래된 역사의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찻길이 이미 그렇게 놓였는데, 그 위에서 방향을 틀기란 쉽지 않다.
진보정당 손발 묶는 정당법
정당법도 문제다. 진보정치가 지역구에서 당선되기 위해서는 후보와 함께 일상적으로 움직여질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행 정당법은 지역조직을 실질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원협의회를 둘 수는 있으나 사무실을 둘 수 없다. 당연히 상근자도 둘 수 없다.
사무실 없는 회사, 노동자 없는 기업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정당의 지역조직은 사무실도 없고, 일하는 사람도 두면 안 된다. 상상 밖의 일이다.
반면에 국회의원은 사무실을 둘 수 있다. 상근자도 둘 수 있다. 국회의원이 많은 거대정당과 의원 수가 적은 소수정당이 지역 선거에서 역량 차이가 크게 나는 이유 중 하나다. 앞선 자는 자동차를 타고 가고, 뒤쫓는 자는 걸어가는 꼴이다.
이러니 지역의 보수적 풀뿌리 네트워크는 어떤 정치적 도전도 받지 않고 계속 유지돼 왔다. 이에 도전해야 할 진보정당의 지역 조직은 사무실도 둘 수 없어 손발이 묶인 도전자 신세였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뭉쳐야 살고,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일수록 조직을 이뤄 움직여야 이긴다. 그러나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조직'이란 대체로 교회나 성당 같은 종교조직이거나, 앞서 말한 관변단체 조직이거나, 아니면 정치색깔 없는 봉사조직들이다. 예를 들어 중앙정치에서 여성단체는 성평등을 위한 조직이지만, 지역 조직에서 여성단체는 여성들이 모여 봉사하는 조직이다. 이들은 대체로 보수적 성향이고, 정치현안을 늘 보수적으로 해석한다.
요즘은 마을공동체 운동 등이 활성화되면서 과거보단 나아졌지만, 대세가 바뀌진 않았다. 게다가 마을공동체 운동 역시 '정치적 중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태도가 계속되는 한 마을공동체 운동으로부터 정치가 바뀔 가능성을 찾는 건 꽤 오래 걸릴 일이다.
덕분에 중앙무대에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진보정치인들조차도 동네에 가면 그런 이슈들에 대해 소극적이 된다. 예를 들어, 중앙에선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단호히 찬성하는 정치인들이 동네에서는 가급적 성소수자 이슈를 피하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역구 의원이 많은 것 자체가 문제
▲20대 총선(2016)을 이틀 앞둔 2016년 4월 11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는 모습.
공동취재사진
이것이 '지역'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지역'을 기준으로 대부분의 국회의원을 뽑는다. 이미 기존 세력이 선점한 곳,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보수적으로 조직된 소수에 의해 강고하게 유지되는 곳, 이런 곳에서 국회의원의 다수를 뽑으니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 진보적인 인물이 많아질 가능성이 그렇게 낮은 것이다.
때로 개인의 놀라운 노력으로 당선되는 진보정당 의원들이 있긴 하다. 노회찬 대표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선거제도가 지역구 위주라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는다. 새로운 인물은 새로운 정치세력이 아니라 기존 정치세력에게 몰린다. 중선거구제가 되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노회찬조차도 당선되기 어려웠던 소선거구제 하에서의 '지역구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바뀌면 노회찬까지만 당선시키는 제도로 역할을 할 것이다. 노회찬 대표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라 '세력의 교체'였고, 국민의 뜻을 그대로 반영한 '민심 그대로 국회'였다.
중선거구제냐 연동형비례대표제냐가 쟁점이 아니다.
연동형비례대표제를 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가 쟁점이다.
노회찬재단(가칭) 설립추진 |
노회찬재단(가칭) 설립 실행위원회는 지난 10월 8일부터 준비위원 구성 및 시민추진위원 모집을 시작했다. 시민추진위원 참여는 노회찬재단 준비위원회 홈페이지(https://www.hcroh.org)에서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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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전 대변인,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까페2 진행자
정의당 교육연수원장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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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선거구제 주장한 한국당, 유신의 후예를 자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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