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에서, 열다섯 살의 클라라비크, 피아노 위에 그녀의 협주곡 7번 3악장 솔로파트가 펼쳐져있다.
츠비카우의 로베르트 슈만 하우스
1838년, 오스트리아의 극시인 프란츠 그릴파처는 18살의 소녀 클라라 비크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57번(열정)을 듣고 '클라라 비크와 베토벤'이라는 시를 써서 클라라를 극찬하며 그와 베토벤을 나란히 놓았다.
빈에서 클라라는 당대의 비르투오소(기교가 뛰어난 전문 연주자)인 니콜로 파가니니,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의 인기를 넘어섰다. 콘서트 때마다 광적인 환호로 무려 13번의 커튼콜을 받은 적도 있으며 오스트리아는 그를 황실 연주가로 지명하였다. 이 상은 18세 연주자에게 수여된 적도, 외국인 여성에게 수여된 적도 없었으며, 제후는 그를 일컬어 '경이로움 그 자체'라 칭했다.
클라라 비크(1819-1896)는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교사이자, 피아노 상인이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아래 비크)와 소프라노 솔리스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엄마 마리안 트롬리츠 비크 바르기엘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녀로 자랐다.
아버지 비크는 어머니 마리안보다 12살이 많았고 타고난 사업가에 야심 가득한 인물이었다. 19살이었던 마리안은 결혼 후 첫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매주 솔로로 노래했으며, 때로는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마리안이 공연할 때마다 피아노 선생으로서 비크의 명성도 올라갔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비크는 마리안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마리안은 공연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남편의 친구인 피아노 교사 아돌프 바르기엘과 함께 피아노를 연습했으며, 가사를 도맡았고, 피아노반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는 7년 사이에 아이도 다섯을 낳았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남편의 욕망과 착취를 견딜 수 없었던 마리안은 그 다섯 번째 아이를 낳자마자 클라라와 막내를 데리고 집을 나와 친정집으로 도망가 버렸다.
하지만 막내는 곧 사망했고 아이들의 소유권은 모두 남편에게 있었기에 마리안은 클라라와 눈물의 이별을 한다. 이혼 후, 마리안은 남편의 친구이자 피아노 교사였던 그 아돌프 바르기엘과 재혼한다. 아돌프는 비크와 다르게 매우 다정한 사람이었고 둘은 네 아이를 낳았다.
불행히도 아돌프는 1841년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마리안은 피아노 교습을 하며 홀로 네 아이를 키운다. 그 중 둘째 아들이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인 볼데마를 바르기엘이며, 훗날 클라라와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된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던 마리안이 떠나자 비크의 모든 관심은 클라라에게 쏠렸다. 그가 온 정성을 쏟은 만큼 클라라는 타고난 재능으로 그를 만족시켰다. 두 남동생은 음악적 재능이 없었기에 늘 화풀이 대상이거나 뒷전이었고, 따라서 자립할 나이가 되자마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독립했다. 9살의 클라라는 신동이란 꼬리표를 달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비크의 목표는 단 하나. 위대한 예술가를 만드는 일. 덕분에 최상의 교육을 클라라에게 제공한다. 개인 교습을 통하여 영어와 프랑스어를, 크리스찬 테오도르 바인리그에게서 음악 이론과 화성을, 라이프치히 오페라 음악감독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연주 여행을 다니며 그곳의 유명한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대위법, 관현악 조곡법, 성악과 바이올린, 그리고 종교학까지 공부하게 했다. 저녁 시간에는 오페라나 연극 관람으로 채워졌다.
클라라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마치자 이에 비크는 성공의 확신에 차서 예술의 성지, 파리로 연주를 떠난다. 중간 기착지 바이마르의 사저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 사저는 괴테의 집이었다.
12살이었던 클라라의 연주에 깊이 감동한 괴테는 클라라의 연주가 남자아이 6명이 치는 것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감탄하며, 자신의 초상화가 담긴 메달에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은 예술가 클라라 비크에게"라는 문구를 써서 건넸다. 이 공연에 대한 바이마르 특파원이 쓴 콘서트 논평을 보자.
'아직 어린 연주자인 클라라 비크는 프로그램의 첫 곡부터 청중의 어마어마한 환호를 이끌어 냈고, 이어지는 곡에서는 영광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실로 이 연주자는 위대한 기술과 침착함, 그리고 힘을 갖고 가장 어려운 악장들마저 너무나 쉽게 연주해냈는데, 이 점이 실로 경이롭다. 더욱 특기할 만한 점은 클라라 비크의 연주가 선보이는 영혼과 감정의 깊이다. 누구도 감히 그 이상 바라지 못할 만큼 완벽한 연주였다.'
파리에 도착한 비크는 쇼팽에게 연락을 취했고, 클라라가 쇼팽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왔다. 9살 연상의 쇼팽은 클라라의 연주에 매료되었다. 쇼팽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E 단조 필사본을 클라라에게 보내며 "너 같은 놀라운 재능의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해 주길 고대하며"라는 메모를 남긴다.
이후에도 쇼팽은 직접 클라라를 방문해 그의 연주를 듣고 자신도 연주로 응답했다. 그리고 클라라의 OP. 5 작품을 얻어가며 답례로 '알붐블라트'라는 작품을 선물했는데, 그 필사본에는 '1836년 9월 12일 라이프치히, 클라라의 추종자가 그녀를 그리워합니다'라고 자필로 서명했다. 쇼팽의 곡을 너무도 좋아해서 매 공연 그의 곡을 연주했던 클라라는 71살 그의 공식적인 고별무대에서도 쇼팽의 F 단조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비크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음악을 배우고자 찾아온 이가 있었다.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비크는 슈만을 보고 그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봤다. 그렇게 슈만은 비크의 제자로 들어가 그의 집에서 1년 동안 같이 살았다. 당시 11살이었던 클라라는 20세 슈만에게 그저 꼬마였다.
슈만은 클라라와 같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유치한 장난을 치며 보냈는데, 이것이 클라라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틀에 꽉 짜인 생활 속에서 그는 단비 같은 존재였다. 클라라는 9살 때부터 이미 작곡을 했는데, 1831년에 출간된 자신의 곡 낭만 변주곡을 슈만에게 헌정했다.
슈만은 비크의 제자인 어네스티네 폰 프릭켄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다. 한때는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였으나, 인연이 아니었는지 둘은 깨졌다. 슈만의 관심은 클라라(당시 16세였다)에게 옮겨왔다. 이를 눈치챈 비크는 노발대발하며 클라라에게 슈만을 계속 만나면 그를 총으로 쏘겠다고 협박했다.
비록 슈만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클라라는 이미 국제적인 스타였고 슈만은 주변에만 이름이 알려진 무명의 음악가였다. 이런 슈만이 비크의 눈에 찰 리가 없다. 더욱이 비크는 클라라를 이용해 막 큰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