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박열>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진이 일어난 1일 저녁부터, "조선인이 폭탄을 투척해 도쿄를 습격하려고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서 일본인을 죽이려고 한다" 등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는 2일 밤에 긴급 칙령에 따라 계엄령 '조선인 폭동 단속'을 선포한다.
군대와 경찰은 계엄령 아래 움직이기 시작했고, 5일에 가메이도(亀井戸) 경찰서는 선동자로서 조선인 6명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구속하였다. 당시, 가메이도 경찰서는 조선인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가메이도 학살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매일신보>는 위와 같은 괴소문의 내용을 '강도, 능욕, 방화-불량 조선인의 폭동은 이와 같음'(1923.09.10)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일본 정부의 잘못된 책동을 믿은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결성하여, 조선인을 폭행/살상하기 시작한다. 9월 1일 지진 당일, 자경단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은 500명이 넘는다. 심지어 1일부터 6일 사이에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6,000여 명에 이르며, 지진으로 죽은 사람보다 학살로 인해 죽인 사람이 더 많았다. 또한, 계엄령에 의해 군대와 경찰에게 구속된 도쿄 부근 한인만 1만 5천 명에 달했다.
일본 정부가 자경단의 행동을 제재시키게 된 것은 자경단의 만행이 외국 언론에 보도되어 비난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대한 피해 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군대와 경찰 그리고 자경단원도 증거불충분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신한민보>는 당시의 사건을 1923년 9월부터 1924년 7월까지 약 1년간에 걸쳐서 '한인 1만 5천 명을 가두어'(1923.09.13), '한인은 다 죽였다고 말한다'(1923.11,08), '한인 학살 사건의 진상'(1924.06.12/06.19/06.26/07.03) 등의 기사로 상세히 보도하였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세워진 도쿄 도립 요코아미쵸 공원
문헌 조사 중, 나는 도쿄에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사건에 관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석 있는 곳은 도쿄 도립 공원인 요코아미쵸 공원(横綱町公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