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을 들고 있는 여인(베르나르 뷔페, 1947,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
예술의전당
이 그림은 뷔페가 19살에 그린 '닭을 들고 있는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비쩍 마르고 길게 늘여 놓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이 발표되었을 때 파리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다들 자기가 모델인 줄 알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는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배급을 타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난방이 이뤄지지 않는 겨울에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몸을 붙이고 추위를 견딜 정도였다. 그러니 이 그림은 어떤 과장도 없이 현실이었다. 그를 가리켜 20세기 파리의 산증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뷔페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피카소와 뷔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뷔페는 뜨는 별, 피카소는 지는 별로. 어떤 비평가는 피카소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했다. 입체파나 야수파, 어떤 거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새로운 뷔페의 열풍이 불었다. 이에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피카소는 자존심이 상하고 또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20살에 비평가상을 받고 세상은 이토록 난리인지.
뷔페의 전시에 피카소가 왔다. 피카소는 전시장에 들어서자 아무 그림도 둘러 보지 않고 곧바로 이 그림 앞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그림 앞에 서 있다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그리고 어떤 언급도 없었다.
피카소는 이 그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질문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며 이 그림 앞에 관람자들을 멈추게 만든다. 피카소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방식이 작품 단 하나면 충분했던 것'인지 단지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인지 당사자가 눈을 감은 마당에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일화는 결과적으로 이 그림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뷔페의 생애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지고지순한 평생 '온리 원' 사랑, 명성의 추락,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음에 좌절한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전시 후기도 아니고 그간 연재했던 '그림의 말들' 에필로그도 아닌데 말이 길어졌다. 이렇듯 전시를 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고 할 말도 많아진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게 '그림의 말들'이다. 그동안 일 년 반을 연재하면서 나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연재기사 :
그림의 말들 보러가기]
알고 있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여서, 작가 한 명에 대해 글을 쓰고 나면, 어떨 땐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무당이 접신을 하듯 나도 그 사람의 인생에 깊숙이 들어가 그가 되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배우가 어떤 역할에 깊이 빠졌다가 나오면 현실로 돌아오기가 힘들다고 하는 말은 진짜였다. 프리다 칼로가 그랬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렘브란트, 나혜석이 그랬다.
몇 차례 타인이 되는 경험을 하고 나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결은 그 밑에 숨겨진 사건과 환경, 타고난 성품 등 다양한 기반에 근거하기 때문에 단숨에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성숙과 파멸의 경계를 확인하면서 성숙의 길을 택하는 게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게 했다. 또,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내가 진정 욕망하는 지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질문이 내 안에서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