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눈만 깜박이며 보낸 8년... 난 결심했다

[루게릭병 환자가 눈으로 쓴 에세이] 누운 채로 떠난 여행

등록 2019.07.30 09:09수정 2019.07.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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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편집자말]
 마을 어부의 배를 타고 금오도 주변 바다를 둘러보았다. 왼쪽이 필자, 오른쪽은 리오바 자매
마을 어부의 배를 타고 금오도 주변 바다를 둘러보았다. 왼쪽이 필자, 오른쪽은 리오바 자매신정금
 
루게릭병으로 더 잘 알려진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환자로 살아온 지난 8년 세월은 좌절의 나날이었다. 특히 인공호흡기를 달고 콧줄로 영양을 투입하기 시작한 2016년 12월부터는 이렇게 반 평도 안 되는 침대에 갇혀 눈만 깜박이며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하나 싶어 더욱 절망했다.

2017년 봄 너무도 간절히 밖에 나가고 싶어 특수휠체어는 미처 생각도 못 하고 119수송 간이침대라도 사서 잠깐이라도 밖에 나가게 해달라고 거의 1년을 매주 일요일 남편에게 졸랐다. 그걸 사면 접었다 펴기가 가능하니 두꺼운 비닐을 덮어 욕실에서 목욕침대로도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불가능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남편은 적극적으로 알아봐주지 않았다. 오랜 투쟁 끝에 내가 간신히 얻은 것은 침대 위에 펼쳐 물을 담아 목욕하는 목욕튜브였다. 물로 목욕을 하니 살 것 같았다.

2017년부터는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소통도 하고 특수휠체어도 생겨 용기를 내서 외출도 하고 여행도 다녀야겠다 결심도 했지만, 스스로 가능한 일이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터라 내 결심이 실행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남편은 특수휠체어를 이용해 여행도 다니자고 했지만, 남편의 말은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지인이 막연하게 언제 시간 나면 밥 한번 먹자 하는 수준의 영혼없는 말이었다. 엄두를 못낸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싶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여행을 다니려면 콧줄을 빼고 위루술(직접 위에 구멍을 만들어서 관을 삽입하여 음식을 넣는 것)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또 몇 달을 졸라서 6개월 전인 2018년 12월 위루술을 했다. 내 속셈을 모르는 분들은 위에 구멍을 뚫어 뱃줄로 식사를 하게 된 걸 안타까워했다. 콧줄을 뺀 내 모습은 한결 나아 보였다. 남편은 내 속셈을 알았을까 싶다.

열흘 전쯤(올해 5월 초) 리오바(가톨릭 세례명) 자매가 나와 같은 병으로 20년 투병중인 마르코 형제님을 모시고 방문했다. 여행 이야기 끝에 자매가 여수 금오도에 숙식 가능한 곳이 있으니 함께 여행 가자 해서 너무 반가워서 꼭 가겠다 약속하고 자매에게 부탁해 서둘러 차도 예약했다.

자매 부부가 돌아간 후 활동보조 언니를 시켜 남편에게 전화로 여행 계획을 전하며 활동보조인 없이 둘만의 여행이 될 거라 했다. 전화 속 남편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집에 가서 이야기 하자는 말투에선 부정의 기운이 느껴졌다.

퇴근 후에 (남편은) 활동보조 언니와 2인 1조로 불가능 쪽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난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주말 내내 남편을 설득해서 드디어 가기로 약속했다. 야호! 하느님 감사합니다.


빈집(앞에서 말한 여수 금오도에 숙식 가능한 곳)이었는데 감사하게도 금오도 집주인 부부도 함께 가겠다고 하고, 마침 그 분이 휠체어 수리를 하시는 분이라 (우리 집으로 와서) 휠체어의 불편한 곳을 몸에 맞게 고쳐주셨다. 주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출발 당일(5월 24일) 아침, 남편은 내게 '가다가 함께 죽자'는 말로 내키지 않은 심리상태를 표출했다. 난 감정을 누르고 감사기도를 했다. 드디어 출발했다.


"가다가 함께 죽자"며 여행을 내키지 않아 했던 남편이 변했다 

짙은 썬팅이 된 차창 밖 5월의 산은 내게 성별만 구별되는 TV 속 아이돌 가수처럼 침엽수와 활엽수로만 구별될 뿐이었다.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형제님이 고쳐주신 휠체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했다.

3시간쯤 달려 여산휴게소에서 뱃줄 식사를 했다. 난 차에서 뒷문을 열고 휠체어를 약간 눕혀서 식사를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남편은 내 의사를 묻지 않고 장애인화장실에서 소변 뒤처리를 한 후 거기서 뱃줄로 식사를 줬다. 내 처지가 잠시 서글펐지만 이 정도쯤이야 하고 넘기기로 했다.

일행들을 휴게소에서 잠시 스치듯 만나고 배 시간에 맞춰 서둘러 출발했다. 여수 돌산에 도착하니 금오도행 배 시간이 촉박했다. 선착장에 도착한 순간 호흡기가 빠져 다시 끼우고 나니 가래가 기도를 막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배가 떠나니 승선한 후에 석션(전동기 등에 연결한 튜브를 이용해 가래 등을 빼내는 것)을 하자며 조금만 참으라 했다. 불과 2~3분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출발 전 9시에 하고 7시간 만에 처음 하는 석션이었다.

승선 후 먼저 타서 기다리던 리오바 자매가 석션을 해주었다. 그제야 남편은 자신감이 생긴 듯 표정이 밝아졌다. 7시간을 석션하지 않고 버틴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파이팅!' 속으로 계속 외쳤다.

집은 소박했지만 주인 내외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저녁식사는 마을 어부들이 잡은 자연산 참돔과 돼지고기구이로 푸짐하게 차려졌다. 회는 삼킬 수 있겠다 싶어 청했더니 리오바 자매가 된장에 무쳐서 먹여줬다. 처음 시도해 보는 것치고는 제법 과한 양을 먹었다. 마르코 형제님은 제법 잘 드셨다. 좋은 안주에 술을 마시며 모인 분들끼리 간단한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인상 좋고 성격 좋은 집주인 형제님과 남매 같은 자매님, 20년째 루게릭병으로 투병중인 마르코 형제님과 헌신적인 아내 리오바 자매, 암 수술 후에 림프에 이상이 생겨 한쪽 팔이 18인치로 붓고 중풍까지 맞은 또 다른 형제님과 멋진 자매님,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전동휠체어에 의지하며 생활하면서도 장애우들을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 자매, 같은 상황의 또 다른 형제님, 광주에서 우리를 돕겠다고 와준 싹싹하고 유머 있는 젊은 형제님, 그리고 우리 부부.

늦은 밤까지 장애인으로 살며 주위의 값싼 동정이나 편견과 맞서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건강했던 시절의 난 어땠던가를 잠시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또 앞으로 이 분들보다 신체적으로 훨씬 열악한 처지의 내가 세상 속에서 겪어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다짐도 했다.

장애우들끼리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고 따뜻했다.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처음 본 분들이었지만 오래된 동무 같았고, 마치 고향집 앞마당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또 내게 소중한 인연을 주시는구나 싶어 감사했다. 인공호흡기의 배터리 충전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릴 때까지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오랜만에 아침까지 깨지 않고 꿀잠을 잤다. 여유로운 아침 식사 후에 작은 동력선으로 어업을 하시는 선장님이 배를 태워준다 해서 선착장으로 나갔다. 4인 1조로 나와 마르코 형제의 휠체어를 옮기고 안전 장치를 한후 바다로 향했다.

제철소가 생기기 전 겨울이면 아버지를 따라 김을 채취하려고 다녔던 광양 앞바다와 닮은 풍경이었다. 점점이 떠있는 크고 작은 무인도, 외로워 보이는 갈매기 한 마리,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물결 잔잔한 바다엔 따사로운 봄볕이 내려앉아 더없이 평화로웠다.

선장님은 바위섬에 배를 붙여 바위에 붙은 조개를 따게 해주셨다. 남편의 뒷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바다 구경을 실컷 하고 잠시 방에서 휴식을 한 후 금오도 석양을 보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지만 날씨가 흐려 포기했다. 마침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라 마을에선 노래 자랑과 불꽃놀이가 있었다. 우리 모두 흥겨워하며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밤바다가 보고싶어 남편과 산책을 나갔다. 어렴풋이 찝찔한 바다내음이 느껴졌다. 방에 들어와서 남편에게 글자판으로 "나 어땠어?" 하고 물으니 남편은 씩씩한 내가 대견스러운듯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흐뭇해했다. 스트레칭, 소독, 고양이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어느새 졸음이 쏟아졌다. 남편에게 나온 김에 가는 길이니 광양 친정과 김제 시댁을 들러서 가자했더니 김제는 다음에 가자 했다. 

고향 사람들에게 이런 내 모습 보이려면 용기를 더 내야 할 것 같다

다음날 아침 금오도 선착장에 도착하니 해무로 배가 뜨지 않아 3시간가량을 기다리고 나서야 배를 탈 수 있었다. 여수에서 광양까지의 거리를 단축시켰다는 이순신대교를 달리고 있다는 게 꿈만 같고 좋았다. 약 한 시간 이상을 달려 광양 진월 면소재지에 도착해 함께 와준 리오바 자매 차를 기다리는데, 혹시 이런 내 모습을 알아보는 이라도 있을까 봐 위축됨을 느꼈다. 고향 사람들에겐 이런 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아직도 한참 더 용기를 내야 가능할 것 같다.

남편도 김제에 가겠다 했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묘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 과수원 산으로 향했다. 산으로 향하며 혹시 엄마 앞에서 나도 모르게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내가 15년을 살았던 고향 마을은 내가 못 와 본 10년 세월에 비해선 별로 변한 게 없었다. 아니 어릴 적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영순아, 혜숙아" 하고 친구들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대답하고 나올 것만 같았다. 

산에는 엄마와 이모가 기다리고 계셨다. 산은 내가 못 와 본 사이에 나무들이 자라서 숲이 더욱 풍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아버지께 마음속으로 "아버지 더 씩씩하고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게요. 하늘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 못한 게 죄스러웠는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를 위해 광양 선산까지 동행해준 리오바 자매에게 뭐라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앞으로의 삶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앞으로는 남편과 함께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즐겁고 기쁘게 살겠노라 다짐했다. 남편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아침 10시에 출발해서 집에 도착하니 밤 9시 30분이었다. 비행기를 탔다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라톤 경기를 완주하고 난 후보다 더한 성취감으로 가슴이 벅차 왔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오복음 7장 7절~8절의 성경 말씀이 살아서 내게 와주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모니터의 자판기 철자에 눈을 맞춘 뒤 깜빡하면 글씨가 입력된다.
모니터의 자판기 철자에 눈을 맞춘 뒤 깜빡하면 글씨가 입력된다.이준호
 
#루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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